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풋볼 보헤미안 Nov 02. 2021

캄 노우 그리고 지금의
FC 바르셀로나를 만든 레전드

바르셀로나 올 타임 최고 전설 쿠발라 라슬로

캄 노우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이 동상 반드시 봤을 것이다. 정문 앞에 있으니까. @풋볼 보헤미안

바르셀로나는 이제 한국인들에게도 굉장히 친숙한 스페인 도시다. 아름다운 풍경, 세계적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혼이 담긴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등 볼거리가 풍성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축구팬들에게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리오넬 메시를 비롯한 세계적 축구 스타들이 몸담은, 그리고 전 세계 축구 선수들이 한 번쯤 몸담고 싶은 ‘이상향 클럽’ FC 바르셀로나의 연고지이기 때문이다.      


‘클럽, 그 이상의 클럽’이라는 모토를 가진 이 팀의 홈구장 캄 노우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축구 팬들의 성지 순례로 늘 붐빈다. 이 캄 노우 정문 앞에 위풍당당한 포스를 풍기며 힘차게 볼을 킥하려는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리카르도 사모라·주제프 사미티에르·루이스 수아레스·요한 크루이프·호마리우·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히바우두·사비·카를로스 푸욜 그리고 지금의 메시에 이르기까지, 워낙 많아 쭉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 바르셀로나의 스타 계보에서 현지 팬들로부터 가장 중요한 레전드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주인공은 쿠발라 라슬로다. 아무래도 한국에는 덜 알려진 잊힌 스타라, ‘꾸레’를 자처하는 바르셀로나 마니아가 아닌 이상 대부분이 누구냐고 물을 듯하다. 1950년대 ‘매직 마자르’라 불리며 최전성기를 구가한 헝가리 출신 스타플레이어임에도 불구하고 푸스카스 페렌치·코츠시스 산도르 등 다른 헝가리 레전드에 비해 후세로부터 덜 조명받는 감도 있다. 하여 소개가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호쾌한 오른발 슛은 쿠발라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풋볼 보헤미안


쿠발라는 ‘정치적 난민’이라는 꽤 특이한 이력을 가진 전설이었다. 1927년 부다페스트 태생인 그는 폴란드·슬로바키아 혈통을 가진 선수였는데, 꽤 복잡한 족보를 가진 탓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코스모폴리탄’, 즉 헝가리인이 아닌 세계 시민을 자처했다고 한다.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축구 선수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 쿠발라에게 어두운 시대상은 그의 발목을 잡아채는 족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헝가리가 공산화된 후, 그는 헝가리를 등졌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국경을 넘는 트럭 짐칸에 몸을 숨겨 떠났다는데, 뒤늦게 소식을 접한 헝가리축구협회(MLSZ)가 FIFA에 제소하는 등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쿠발라는 이곳에서 ‘난민’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축구 선수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0년 헝가리 난민 출신 팀인 ‘헝가리아’를 만들어 활동했다.      


쿠발라는 이 팀을 이끌고 스페인 곳곳을 떠돌면서 친선 경기를 펼쳤는데, 그 덕분에 바르셀로나의 레이더에 포착됐다. 바르셀로나는 ‘지역 라이벌’ RCD 에스파뇰을 상대로 폭발적 득점력과 환상적 개인기, 심지어 축구 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환상적인 쇼맨십을 가진 쿠발라에 홀딱 반했다.      


사미티에르 당시 바르셀로나 스카우트가 쿠발라를 데려오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일화를 소개한다. 본래 쿠발라는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먼저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 사미티에르가 도중에 끼어들어 바르셀로나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수년 후 바르셀로나로 갈 뻔했다가 레알 마드리드로 갈아탄 디 스테파노의 ‘반대 버전’이 먼저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과정은 꽤나 험난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정권 차원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정권은 공산 국가를 탈출해 스페인의 품에 안긴 쿠발라를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여겼다. 정권 차원에서 밀어주려 했던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시키려 했던 이유다.     


이때 사미티에르는 자신의 협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쿠발라의 행선지를 바르셀로나로 바꿨다. 이때 사미티에르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펄쩍 뛸 만한 위험한 조건을 프랑코 총통에게 제의했다. 프랑코 총통에게 쿠발라의 헝가리 탈출 이야기를 프로파간다 영화로 만들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쿠발라를 데려온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쿠발라는 앞서 언급한 헝가리축구협회의 제소 때문에 1년 동안 선수 자격이 박탈된 상태였다. 선수를 영입하고도 공식 경기에 내보낼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디 스테파노(右)와 함께 한 쿠발라(左). 디 스테파노는 이 사진을 찍고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 @풋볼 보헤미안

그런데도 사미티에르와 바르셀로나는 쿠발라에 관해 엄청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선수가 클럽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은 것이다. 그 믿음은 옳았다. 1951년 족쇄가 풀린 후 쿠발라는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했다. 특히 정교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프리킥은 팬들에게 전매특허로 인정받으며 뜨겁게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바르셀로나는 1951-1952시즌 대성공을 거뒀다. 라 리가를 비롯해 다섯 개의 공식 대회 트로피를 안긴 것이다.      


이는 훗날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 체제에서 시즌 6관왕을 얻기 전까지 단일 시즌 최다 우승 횟수다. 지금 기준으로도 역대급이라 평가받을 만한 성공을 이루었으니, 쿠발라가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건 당연했다. 일각에서는 디 스테파노를 레알 마드리드에 넘겨주고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쿠발라였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바르셀로나가 디 스테파노도 과감하게 포기하게 만든 쿠발라의 선수 시절 일대기는, 언뜻 바르셀로나를 수없이 거치고 간 수많은 스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반문일 것이다. 인정한다. 솔직히 솔직히 이보다 더 뜨거운 스포트라이트, 이보다 더 많은 사연을 가진 바르셀로나 스타들도 많다. 그런데도 쿠발라가 그 요한 크루이프까지 발밑에 둘 정도로 현지 팬들에게서 추앙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르셀로나가 배출한 첫 ‘우상형’ 스타였기 때문이다. 쿠발라는 기량 자체도 견줄 상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지만, 무엇보다 그 경기력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재능이 있었다. 마치 지금의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그러한 것처럼, 그는 환상적인 축구 실력을 통해 팬들로부터 우상으로 추앙받았다.      

쿠발라가 등장한 후, 바르셀로나는 축구 잘하는 팀에서 인기 클럽으로 도약했다. @풋볼 보헤미안

당대에 쿠발라를 떠받들었던 팬들은 스스로를 쿠발리스테스(Kubalistes)로 칭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고스란히 바르셀로나의 팬덤으로 흡수됐다. 실제 수치화된 당시 관중 수가 이를 증명한다. 바르셀로나의 기록에 따르면,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바르셀로나의 소시오는 약 2만 6,300명이었다. 그런데 쿠발라가 등장한 후에는 소시오는 5만 2,791명으로 증가했다. 거의 두 배 이상이 늘어난 셈이다.      


관중이 늘어나면 클럽의 덩치도 커진다.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살림살이도 그만큼 늘어난다. 쿠발라가 등장한 후 바르셀로나는 새 구장을 지었다. 아래 사진은 쿠발라가 입단하기 전 바르셀로나 홈구장이었던 캄 데 레스 코르츠다. 간단히 레스 코르츠라 불렸던 곳이다. 


당시 수용 규모가 2만 6,300여 명에 불과한 작은 경기장이었다. 그러나 쿠발라가 입단한 후 소시오가 5만 명이 넘어서면서 이 레스 코르츠가 팬덤을 수용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바르셀로나는 경기장 규모를 6만 석으로 늘렸다. 그런데 이마저도 늘어난 팬층 때문에 금세 포화 상태가 되었다. 이에 1953년 바르셀로나는 금세 또 구장 확장 공사를 고민해야 했다.      

바르셀로나의 옛 홈구장 레스 코르츠 @풋볼 보헤미안

이런 측면에서 쿠발라가 입단한 후 2년이 흐른 1953년에 벌어진 회장 선거는 바르셀로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프란세스크 미로-산스 후보자가 당선됐는데, 미로-산스가 내건 공약이 바로 경기장 신축이었다.     


미로-산스 회장이 “새 경기장이 필요하고, 원하며, 가져야만 한다”라는 공약을 내걸었고, 이 공약은 티켓 전쟁을 치르고 있던 소시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쿠발라의 인기로 비약적으로 증가한 관중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을 만들겠다는 미로-산스 회장의 일성으로 생긴 경기장,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캄 노우다. 즉,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스타디움인 캄 노우는 쿠발라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캄 노우의 등장은 바르셀로나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 이유가 있다. 캄 노우는 비약적으로 증가한 소시오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어주었다. 캄 노우처럼 큰 경기장은 제대로 운영할 수만 있다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수단이 된다.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건, 과거보다 더 좋은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실탄’을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TV 중계권 수익이라는 게 없었다. 입장 수익이 곧 클럽의 재산이었다.      


이 연쇄 작용을 일으킨 쿠발라는 지금의 바르셀로나를 만든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철학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크루이프가 바르셀로나의 소프트웨어를 책임진 전설이라면, 쿠발라는 바르셀로나가 슈퍼 클럽의 하드웨어를 갖추게끔 한 원동력을 불어넣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쿠발라는 1961년 감독과의 불화로 지역 라이벌 RCD 에스파뇰로 이적했으며, 이후 FC 취리히를 거쳐 1967년 캐나다 클럽 토론토 팔콘에서 은퇴했다. 에스파뇰로 떠난 후에는 바르셀로나 시절 보인 퍼포먼스를 재현하지 못했다. 감독으로서도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스페인 올림픽대표팀을 이끌고 금메달을 따는 전성기도 누렸지만, 은퇴 후 영광은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쿠발라는 현역 시절 남긴 족적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전설’이다. 쿠발라가 없었더라면, 캄 노우도 없었을 것이고, 크루이프도 오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의 바르셀로나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게 바로 바르셀로나 현지 팬들이 쿠발라를 올 타임 넘버원으로 꼽은 이유다. 캄 노우 정문 앞에 쿠발라의 위풍당당한 동상이 서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살피면 쿠발라가 캄 노우를 지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풋볼 보헤미안


이전 14화 FC 바르셀로나가 품고 있는 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