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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家業)은 피를 타고 흐르지 않습니다

권력도 예술도 결국은 사람, 후계자는 설계되고 교육되어야 합니다

by spielraum

메디치 가문,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들은 무려 350년(1400~1748) 동안 이탈리아 피렌체를 이끌며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주역이었죠. 교황과 프랑스 왕비까지 배출한, 유럽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명문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지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서 성공한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그 안에 있었던 탁월한 리더들의 존재였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국부(國父)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입니다. 그는 가문의 첫 전성기를 연 인물입니다. 아버지 ‘조반니’로부터 메디치은행을 물려받고 금융업을 통해 사실상의 피렌체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행동하며, 겉으로는 공직을 맡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피렌체의 군주가 아니라, 가장 신뢰받는 시민일 뿐”이라며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력과 네트워크를 통해 공화정 내부의 실권자로 군림했는데요. 특히 피렌체뿐 아니라 로마 교황청 자금을 관리하며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바탕으로 시민 구제, 세금 탕감 등을 통해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외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조율자’이자 ‘후원자’의 역할을 선택했습니다. 정적(政敵)인 ‘알비치 가문’과의 권력 다툼에서도 무력충돌보다는 경제·정치적 연합과 외교적 협상을 통해 승리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리더십은 겸손한 조정자의 모습이자, 말보다는 행동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리더십’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는 드러나기보다는 조용히 방향을 제시하는 ‘보이지 않는 CEO’였던 것이었죠.


두 번째 인물은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53–1478)입니다. 그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등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 예술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전역에서 예술가들이 피렌체로 모여들었고, 르네상스 예술의 찬란한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특히 피렌체 사람들이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자)’라고 칭송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 자신도 직접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면서 예술가들을 지원했습니다.


“젊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그건 덧없이 날아간다. 즐거운 사람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내일도 즐거우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로렌초 데 메디치-


그의 리더십은 단순히 예술가를 발굴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후원자의 역할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술과 문화가 사회를 어떻게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를 이해했고 이를 바탕으로 가문과 도시의 비전을 함께 설계한 ‘비전형 리더’였습니다. 오늘날의 CEO 역시 창의적인 인재에게 자율성과 자원을 제공하고, 혁신이 꽃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리더십이 요구됩니다


세 번째 인물은 로렌초의 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1453–1478)’입니다. 그는 형과 함께 메디치 가문의 공동통치자 역할을 했습니다. 온화하고 따뜻한 성격으로 시민과 귀족, 예술가 누구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게 진짜 리더의 힘’이라는 걸 몸소 보여줬습니다. 마키아벨리조차 “그가 군주가 됐다면 정말 사랑받는 통치자가 됐을 것”이라며 극찬했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고 매력적인 젊은 지도자’로 생각했는데, 정치적 계산보다는 사람을 향한 진심과 따뜻함으로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많은 품성 덕에 자기 집안사람뿐 아니라 피렌체인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 메디치 가문 이야기 中(G.F. 영) -


줄리아노’의 리더십은 ‘공감과 감성 지능형 리더십’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집안사람들 뿐 아니라 피렌체인들에게 진심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감정을 읽고 적절히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오늘날의 경영자에게도 핵심적인 자질로 평가됩니다. 특히 MZ세대와의 소통이 중요한 오늘날, 인간 중심의 공감형 리더십은 점점 더 그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찬란했던 가문은 후계자 선택의 실수로 인해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인물은 로렌초의 아들 피에트로(1471~1503)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삼촌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직접적이고 오만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으며, 귀족층과 시민 사회의 큰 반감을 샀죠


특히 민심을 읽지 못하고 정세 판단에도 서툴렀던 그는 프랑스의 침공 앞에서 어설픈 협상을 시도하다 피렌체의 중요한 요새들을 프랑스군에 넘겨주며 국가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의 분노를 초래했고, 결국 가문이 피렌체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명문가의 몰락은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사례는 ‘잘못된 후계자’가 어떤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가업은 피를 타고 흐르지 않습니다. 유능한 창업자가 유능한 후계자를 낳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리더십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설계와 교육을 통해 길러져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패밀리 비즈니스와 중소기업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물려줄 것인가” 재산의 이전이 아닌 철학의 계승,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아닌 가치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승계의 본질일 것입니다. ‘메디치가문’의 흥망은 그 질문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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