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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처럼 ‘문’을 열고, 조르바처럼 ‘자유롭게'

"나는, 자유다”, 임금피크제 앞에서 다시 쓰는 50대들의 다짐과 선언.

by spielraum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멋진 문장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피크제’를 앞에 두고 선 이 시점에서 다시 이 문장을 떠올리면 그건 하나의 특별한 선언처럼 들립니다.

임금피크제를 앞두고 있다는 건, 한 시기의 끝과 또 다른 시기의 시작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긴 시간,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우리들의 어깨에 이 사회는 ‘정점에서 이제 내려오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은 결코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열정이 식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사회 제도가 그렇고,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의 자긍심과 앞으로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임금피크제’란 일정 나이(보통 55세 전후)에 도달하면 임금 인상을 멈추거나 단계적으로 삭감하는 대신, 정년까지 고용을 유지하는 제도입니다. '일자리를 나누기 위한 타협'이지만, 솔직히 업무 현장의 체감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경력은 깊어졌는데 ‘보상은 줄고’, 존재감은 예전만 못하다는 박탈감. 사무실에서 '경험 많은 선배'에서 '비용 많은 직원'으로 인식이 달라질 때, 임금피크제 대상자는 자꾸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직장과 삶에서 끝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사회가 정해 놓은 속도에 맞춰 달려왔던 우리가 비로소 ‘잠시 멈춤’을 통해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전환점일 수 있습니다. 임금피크제는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제도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페이지를 여느 하나의 장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런 말 하면 동료 선배들에게 욕먹을 줄도 모르겠습니다.


‘조르바’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도 삶을 사랑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자유롭고, 실패하면서 유쾌하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볼 만한 거야”


임금피크제를 앞둔 우리는 이제부터, 누구의 지시가 아닌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더는 승진을 위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경쟁에 치여 ‘나’를 잃을 일도 없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묻고, 선택하고, 나아갈 수 있는 시간. 내가 진짜 원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놓쳐온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마음속에 간직했던 꿈은 사라지지 않았는지(솔직히 저도 제가 원했던 일과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겪는 변화는 ‘퇴보’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는 과정일 것입니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주인공 트루먼은 자신의 상황을 깨닫기 전에는 매일매일 일상이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라고 느끼는 것은 사실 자유가 아닌 길들여진 자유입니다. 트루먼이 세상의 끝에 도달하여 제일 먼전 한 일은 천장에 숨겨진 문을 찾아 여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트루먼’이 되는 순간이죠.


임금피크제는 진짜 ‘트루먼’이 되는 순간입니다. 일에 몰두하느라 미뤄두었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나고, 업무와 실적 너머에 있던 삶의 감각을 되찾는 순간…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말하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지금 이 순간, 어쩌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나의 감정, 가치, 관계, 꿈 그런 것들이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성과’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의 리듬을 만들어갈 수 있는 순간. 우리는 지금 거기까지 왔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에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임금피크제는 어떤 의미에선 하나의 ‘껍질’입니다


지금껏 익숙했던 세계가 저물고, 전혀 새로운 삶의 형식이 열리는 시점.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낳고, 나만의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야 할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돌이켜 보면 지금껏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으니까요…


이제는 수입이 조금씩 줄고, 역할이 달라지고, ‘현장’에서 한 발 물러서야 하지만 그 자리를 ‘위기’가 아닌 ‘자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단단하고, 더 지혜로운 방식으로 삶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멈춤’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니까요. 그 시작을 ‘축소’나 ‘후퇴’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가장 응축되고 정제된 도약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누구보다 강하고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여는 도약판 위에 서있는, 우리는 이제, 이렇게 외칩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문장이 이제는 저와 여러분의 말이 되기를, 그 두려움 없는 자유가 임금피크제 이후 하루하루를 밝혀 주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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