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이유도 모른 채 거대한 벌레로 깨어난다는 그로테스크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첫 문장은, ‘그레고르’의 삶이 이미 사회와 단절된 존재로 전락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출근’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벌레가 된 몸속에서도 그를 ‘직장인’이라는 현실에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50대 직장인들의 현실과 놀랄 만큼 닮아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선 그들은 속으로 묻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 조직에 필요한 사람일까?” 시스템은 빠르게 변하고, 후배들은 더 똑똑해졌으며, 몸은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매일 어김없이 출근해 조용히 자리를 지킵니다. 그것은 ‘책임감’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짊어진 조용한 헌신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짐들이 오늘도 그들을 출근길에 세웁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합니다. 모든 생물의 행동은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라고. 생존과 번식, 협력과 양육, 이 모든 것은 유전자를 확장하고 보존하기 위한 정교한 선택입니다.
직장 생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점점 책임이 되었고, 결국 말없이 감당해야 할 무게로 남았습니다. 이 고요한 책임과 무게는 ‘유전자’의 계산 너머에 있습니다. 어쩌면 이조차도 생존을 위한 전략일 수 있지만, 그 무게는 단지 유전적 계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윤리의 무게이며 말없이 빛나는 ‘사람 다움’의 품격입니다.
상사의 지시에는 묵묵히 따르면서도, 후배의 고충은 결코 흘려듣지 않는 중간관리자. 언제나 자신보다 조직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는 선배들. 이들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부속품이 아닙니다. 조직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리듬을 조율하고, 기억을 잇고, 문화를 전수하는 ‘살아 있는 유전자’입니다.
그들은 30여 년을 묵묵히 견뎌왔습니다. 치열한 자연선택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은, 고요한 생존자들. 변화 앞에 주저하지 않았고, 갈등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부당함조차 껴안고 견뎌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책임’과 ‘헌신’이라는 내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습니다. 그 불씨는 유전자의 명령을 넘어선 그들 만의, 깊고 오래된 의무이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이타심’도 아닙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확장된 이타성’— 생물학적 유전자가 인간에게 와서 문화적·윤리적·지적 차원의‘밈(meme)’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처럼 —그들의 책임감과 헌신 역시, 유전자의 고등한 자기 복제 전략이며, 직장에서 자신을 이어가려는 진화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직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을 돕는 것이 결국 자신의 존재를 새기는 방식임을…
하지만 ‘변신’ 은 우리에게 냉혹한 질문을 던집니다. 책임과 헌신은 과연 의미 있는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가? ‘그레고르’는 가족과 회사를 위해 묵묵히 일했고, 온갖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 그들은 그를 외면합니다. 이제 누구도 ‘그레고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고, 그가 떠난 뒤, 가족은 오히려 가벼워졌습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소풍을 떠납니다. 그가 감당해 온 모든 책임과 희생은 그 순간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고, 조용히,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변신’의 마지막 장면은 묘한 두려움을 남깁니다.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일.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스쳐 갔을 질문입니다. ‘그레고르’처럼 조용히 잊히고 마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의 가족도, 지금의 조직도, 누군가의 버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 있었지만, 바로 그 침묵의 자리에 누군가가 있었기에 오늘이 이어졌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책임, 이름 없는 헌신, 그 모든 무명의 시간 위에 지금이 세워졌습니다.
진화는 적응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기록의 산증인이며, 하나의 조직을 조용히 지탱해 온 ‘침묵의 유전자’입니다.’ 변신’의 ‘그레고르가’ 남긴 비극은, 누구도 그의 책임과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당신이 걸어온 날들의 무게를, 말없이 감내한 시간의 결을, 그리고 소리 없는 헌신의 진화를.
‘진화’와 ‘자연선택’의 시간 앞에 한 개인의 삶은 찰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찰나들이 이어져 하나의 계보를 만들고, 오늘의 조직과 내일의 세상을 지탱해 갑니다. 당신은 결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진화’의 긴 여정 끝에 살아남은 뿌리 깊은 나무이며, 거센 바람 속에서 마지막 불빛을 지켜온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