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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ielraum Feb 14. 2022

늙은 염낭 거미 닮아가는 사람

부모와 자식 경제적 독립 전에 '공감적 배려'가 먼저다

30년간 중견기업에서 일을 마치고  은퇴했다는 이웃소식을 접했다. 장을 떠나면서 3억 원 넘는 퇴직금과 조금 모아 둔 돈으로 여유 있는 노후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딸 혼수비용과 취업 못한 아들 뒷바라지에 퇴직금을 조금씩 갉아먹더니, 재산이라곤 이제 30평 아파트 밖에 없다며 푸념했다. 지금은 손주 육아를 위해 딸 집 옆으로 이사했다.


천명관 작가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령화 가족>이 있다. 영화는 전쟁터와 같은 사회생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패잔병이 되어 엄마 곁으로 돌아오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다. 과거에는 부모가 자녀의 교육, 결혼 등을 뒷바라지하면, 자녀는 나이 든 부모를 다시 부양하는 선순환 구조였다. 부모가 늙으면 가족이 부양했고 아들딸이 연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경제 사정이 좋지 않고 핵가족화되다 보니 지금은 나이 든 자녀를 오히려 나이 든 부모가 계속 부양해야 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20세가 되면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프랑스 영화 <Tanguy>에서 주인공 ‘탕기’는 28세가 넘은 나이에도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이유로  독립하지 않으려 한다. 부모는 이런 아들을 웬수 같이 생각하게 되고 집에서 나가게 할 궁리를 찾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에서는 유명한 영화다. 현재에도 어른이 되어서 독립하지 않은 프랑스 젊은이를 ‘탕기’에 비유한다.


나는 늙은 염낭 거미를 닮아가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독거미의 일종인 ‘염낭 거미’는 새끼가 먹을 것이 없으면 제살을 먹이로 주는 습성이 있다. 나는 내 살을 내어주지 못한다. “나는 내 인생이 있는 것이고, 너희는 너희들의 삶이 있는 것이니 내 살을 내어줄 용기가 없다” 고 솔직히 고백한다. 자녀를 낳았으니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이 부모로서 인지상정 아니겠냐고 누군가 항변하면, 경제적 독립 기준은 무엇이고 언제까지 부양해야 하는지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시민 작가는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에게 제일 해주고 싶은 첫 번째 기가 ‘독립할 준비’라고 했다. 대학 다닐 때 청년들이 생각해야 되는 것은 내 혼자 힘으로 이 크고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 그게 대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고 이 준비를 갖추지 못하면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 들어도 부모 품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든 자식이든 누구에게 의존하는 삶은 존엄한 삶이 되기 어렵다. 부모가 낳아서 이십년 동안 키워주고 공부시켰으면 이제 스스로 설 준비를 해야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치열하게 찾아야 한다. 이런 얘기하면 ‘꼰’ 소리 듣기 딱 좋다. 그래도 할 말은 하자.


큰 딸이 대학 졸업반이다. 고3이 엊그제였는데 시간이 바람에 구름 밀리듯 지나갔다. 부모로서 최소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부모 역할이 어떻게 등록금 몇 푼 지원해주고 그 역할을 다 했다 할 수 있을까? 딸은 요즈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험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립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경제적 독립’의 기준은 또 무엇인지 솔직히 나는 알지 못한다. 자립과 독립이 돈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인생을 공감해야 한다. 공감은 어떤 감정을 단순히 느끼는 인지적 단계를 넘어, 겪고 있는 감정을  개선하려는 '공감적 배려'여야 한다. 부모도 마찬 가지다.


‘자녀리스크’라는 말이 간혹 언론에 등장한다. 솔직히 이 단어에 거부감이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공감 배려가 빠진 단어 느껴지기 때문이다. 뒤집으면 ‘부모 리스크’도 있다는 말 아닌가? 자녀를 노후대책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부모는 적다. 아니 없다. 솔직히 자녀도 부모를 책임질 형편이 못 된다. 부모도 자식들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안다. 형편이 괜찮은 형제가 있어 부모를 봉양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사는 형편이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 서운할 법 하지만 물심 양심으로 지원했으니 봉양받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부모는 자식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뒤집으면 자식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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