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벌어진 우리 동네 이야기
혹시 기부해 본 적이 있어? 나는 추운 겨울에 지하철 타고 집 가서 떡볶이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눈앞에 놓인 5천 원짜리 한 장이 보인 거야! 그래서 낼름 집고 주변을 돌아봤지. 5천 원이면 오뎅에 떡볶이, 오징어튀김까지 먹을 수 있었거든! 하지만 나의 노력으로 번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바로 개찰구 옆에 있었던 불우이웃 돕기 성금함에 기부했던 기억이나!
몸은 추웠지만 마음은 참 따뜻했던 첫 기부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오늘은 따뜻한 첫 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제주 4·3사건 당시 '경찰 영웅' 故 문형순 전 서장의 의로운 행동으로 목숨을 건진 청년이 반세기가 지나 국가보상금을 오히려 문 서장 및 4·3 위인을 기리는데 처음으로 기부했던 이야기야.
"제주 4·3사건이 뭐야?"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야. 미군 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되었어.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 되어버렸지.
아주 끔찍한 사건이야.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니.. 참 안타까워
"도대체 왜 일어난 거야?"
1947년 3월 1일에 제주도에서 3·1절 28주년을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렸어. 그런데 순찰하고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의 어린아이가 치여서 다쳐버렸지 뭐야! 그런데 기마경찰이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고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어버렸지. 결국 제주 4·3사건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버렸어.
위 사건 일어난 지 9일 후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 파업이 시작됐어. 제주도민의 이런 행동을 보고 있던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해버렸고, 본토에는 응원경찰과 극우 청년 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학하기 시작했지.
그 이후에 5·10 총선거의 반대하는 세력과 또 미국 등 많은 갈등이 이루어지고 결국 제주 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지.
"선한 영향력은 나비효과를 불러오나 봐!"
그런데 이 가운데 당시 성산포 경찰서에 문 서장은 1950년 8월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군부의 명령을 거부해 성산포와 모슬포 주민 200여 명을 구했어. 그 200명 중 한 청년이 머리가 힐끗 한 아흔이 돼서 기부를 하게 된 거야.
당시에 문 서장님이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까먹지 않고 한국전쟁에 참여하시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올 수 있었다고 하셔.
그렇게 백발노인이 된 된 할아버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 "아직도 서장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도민과 4·3유족들도 문 전 서장님의 업적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다"라고 눈물로 끝맺음을 지으셨지.
"끝나지 않은 따뜻한 이야기"
제주도에서는 보상금 지급이 결정된 생존희생자·유족 등 총 300명에게 1인당 최대 9,000만 원의 국가보상금을 지급했다고 해! 이에 정부는 2026년까지 4·3 희생자 1만 101명에게 총 9,05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할 계획이라 하니까 꼭 모두 신청하셨으면 좋겠어!
이 이야기가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꼭 우리 이웃 모두에 퍼져서 따뜻함을 나눠주고 같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야.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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