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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팀장 Jan 14. 2016

인턴의 추억

돈보다 더 값진 일의 가치와 자존감

추억에 젖다보니 인턴사원 때 일도 떠오른다.
25살 고졸에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던 나는
무작정 광고대행사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지금 보면 정말 말도 안되고 터무니가 없는
제가 '이 광고대행사를 광고하겠습니다'라는
10장짜리 PPT를 제안서랍시고 면접에 들고가서
회사는 그런 나를 반신반의하며 뽑아줬지만
3개월 뒤 돌아오는 것은 냉정한 인턴미션이였다.  


1. 당신이 아무런 산업업종을 하나 택해서
2. 그 산업 업종에 대한 제안서를 쓴 다음
3. 직접 밖에 나가서 광고를 수주해오라는


보험 영업 돌방보다도 어렵고 막연한 것이었다.
야박하게도 아무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


2011년 오디션 프로가 한창 유행을 하면서
나는 실용음학학원에 광고를 제안하기로 했다.
혼자서 또 밤새 말도 안되는 제안서를 쓰고
50부를 인쇄하고 제본해서(이 것도 내돈으로 함)
6~7월 한 여름에 검은양복을 입고 밖을 돌았다.


어린 놈이 한 여름에 검은 양복에 땀을 뻘뻘 흘리고
다짜고짜 광고를 하라고 하니 얼척이 없었거니와
내가 광고주여도 해야 할 메리트가 없었다.


평가일은 다가왔지만 반복되는 거절로 자신감을 잃고
성장이라는 명목 아래 나를 궁지로 밀어붙인
회사와 내가 처해진 현실에 환멸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인턴미션에 실패했고 회사는 
온갖 자존심을 깎으면서 마지못해 써준다는 식으로 
채용해주었지만 나는 크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입사 초기, 내가 느끼는 것은 무관심과 냉대였다.


아픈 경험은 다행히도 포기가 아닌 자극제가 되어
주말에도 몰래 회사에 나와서 일에 대해 공부하였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정말 절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저녁 7시에 회사에 왔는데
마침 택시에서 지갑을 분실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때 전화 한 통이 왔는데 실용음악 강사라고 했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출강하는 학원에서 우연히
데스크에 놓여진 제안서를 보게 되었다며 보고나서 
내용이 좋은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컴컴한 사무실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은인처럼 감사했으며
지난 아픈 시간들마저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며칠 뒤 퇴근하고 이수역 실용음악학원으로 미팅을 갔고
그 것이 나의 처음이자 비공식 광고주 미팅이었다.
나를 알아주고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 포기하지 않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이후에 그 분은 사정으로 광고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얻은 경험과 값어치가 무엇인지 기억한다.


돈보다 더 값진 일의 보람과 내 가치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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