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딥페이크 성범죄가 보도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이 사건이 내게 새로운 종류의 절망으로 다가오게 될 것인지 가늠해 보았다. 내게 완전히 새로운 절망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익숙한 절망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정말로 절망스러워졌다. 이런 일이 또 반복되는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복’은 아니었다. 디지털 성범죄는 반복되는 동시에 ‘발전’했다.
석순 54호 <N번방 사건 아카이브>*에서는 N번방 집단 성범죄 사건에 대해 정리하고, 강간문화를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지 4년이 지났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이전의 디지털 성범죄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을 뿐, 사건의 본질은 ‘강간문화’로 동일하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올해 8월 처음 발생한 것이 아니다. N번방 성범죄가 화두 되었을 때도 딥페이크 기술이 성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했다. 그러나 정부는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발생한 전혀 다른’ 성범죄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딥페이크 성범죄의 발생 원인을 강간문화가 아닌 기술의 발전으로 삼으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이는 N번방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 개인을 ‘악마화’하며 구조적 성차별을 은폐하려고 했던 언론의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이 변했는가. N번방 성범죄 이후 관련 법안이 마련되었으나 딥페이크 처벌법에 기소된 피의자 대부분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강간문화가 가해자를 만들고, 구조적 성차별이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내놓으면서 폭력의 굴레는 반복된다. N번방 성범죄가, 버닝썬 게이트가, 웹하드 카르텔과 소라넷이, 청소년 성착취물 비디오가, 그리고 딥페이크 성범죄가 수많은 여성들을 죽였다. 디지털 성범죄가 발생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시간 동안 디지털 성범죄는 강간문화를 토양으로, 정부와 언론의 방관을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라왔다.
예순세 번째 석순 <딥페이크 성범죄를 직시하다>에서는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을 간략히 기록하고 딥페이크 성범죄를 다양한 방면에서 분석한다. 먼저 <시대: 폭력이 돈이 되다>에서는 딥페이크 성범죄를 뒷받침하는 자본에 대해서 살펴본다. '고어 자본주의'는 고도화된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제3세계의 주변화된 남성성이 어떻게 폭력을 생산 수단으로 삼는지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를 바탕으로 식민지 남성성에 뿌리를 둔 한국의 고어 남성성이 디지털 성범죄로 자본을 축적해 온 강간문화적 구조를 지적한다. 그 다음 <인셀: 폭력이 '권리'가 되다>에서는 남초 커뮤니티의 논리가 어떻게 딥페이크 성범죄를 뒷받침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인셀의 논리는 더 이상 모니터 속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모니터 밖으로 나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를 더 이상 온라인 속 ‘찌질한 남성들’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딥페이크 성범죄의 기반이 된 강간 문화와 인셀 커뮤니티의 주장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설명한다. 세 번째 글인 <마주하고 분노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9월 고려대 학내인권단체협의회에서 열린 딥페이크 성범죄 규탄 대자보전에 여학생위원회와 함께 참여했던 글이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청소년의 문제’로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서, 단톡방 성희롱부터 시작해 딥페이크 성범죄까지 끊이지 않는 대학 내 성폭력과 그 대응에 관한 문제 제기가 절실하다. 글에서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대학 당국이 디지털 성폭력을 두려워하는 학우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을 촉구한다. 덧붙여, 대자보를 재게시하면서 딥페이크 성범죄 규탄 행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석순 54호 <N번방 사건 아카이브>의 마지막 글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거대해 보이는 강간 문화의 벽을 두드릴 것이다.
우리는 계속 존재할 것이고, 그 벽은 반드시 깨질 테니까.
더 이상의 반복은 없어야 한다. 성착취와 강간문화를, 자본 아래 여성을 착취하는 굴레를, ‘강간할 권리’를 외치는 인셀의 논리를 끊어내야 한다. 거대해 보이는 강간문화의 벽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부술 것이다. 부정되고 은폐되는 폭력을 폭력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의 목소리가, 우리가 만들어낸 균열이 폭력의 붕괴를 이끌어올 것이다. 특집 아래 묶인 세 개의 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더 이상의 폭력은 없다.
참고문헌
<기타>
석순 릴레이 특집글(2020a). <N번방 사건 아카이브>. ⟪석순⟫. 54:1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