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들

- 노동의 소중한 가치를 생각해 본다 -

by 늘푸른 노병


몇 달의 백수 생활은 ‘쉼’이 아니라 정체성과
리듬이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노동은 돈벌이를
넘어 자존감·소속감·생존을 지키는 삶의 구조였다.

은퇴는 멈춤이 아니라 무대를 바꾸는 일이며,
60대에도 노동은 나를 살린다.


서너 달, 본의 아니게 백수가 되어 지냈다.

육체는 쉬게 되었지만 정신은 온통 번잡한

잡생각으로 가득했다.


조금은 여유를 찾는다고 가까운 곳도

다녀오고, 그동안 못 한 밀린 일들도 하고,

명화도 몇 편씩 보고, 가까운 산도 타봤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무언가 빠진 느낌. 허전함.

그리고 불안감. 이것이 바로 평생 조직생활하던

패턴이 무너진 데서 오는 공허감,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우체통의 공포


며칠 지나면서 느낀 것이 있다.

하루해가 참 짧다는 것. 그리고 진짜

공포는 따로 있었다. 우체통이었다.


잠시 외출하고 돌아올 때마다 우체통에

쌓인 고지서들. 아파트 관리비, 건강보험료,

세금, 통신비. 매일매일 청구서가 날아오는

것 같았다.


핵심은 이것이다. 수입은 없는데

나가는 돈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집에 있으니까 전기세, 수도세도 더 나왔다.

그때 깨달았다.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문제라는 것을.




혼자만의 시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또 다른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도 동물적 본능이 있는지 점점

더 나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씻기 싫어졌다.

어차피 나갈 데도 없는데 뭐 하러.

면도도 이틀에 한 번으로 줄었다.


옷은 하루 종일 트레이닝복이 편했다.

점점 흐트러졌다. 그러다 거울을 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생기가 없고 눈빛이 흐렸다.

이게 나인가?


한 달 전만 해도 매일 아침 단정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던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정체성의 상실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회사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은퇴자도 아니고. 소속감이

사라지자 멘털이 흔들렸다.


아침에 일어나는 이유가 없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누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무기력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노동이 주는 다섯 가지 교훈


그렇게 석 달을 보내고 나니,

노동이 내게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보였다.


첫째, 경제적 생존이다.

당연하지만 가장 중요하다. 세금과

생활비를 감당할 수입이 있어야 산다.

줄일 수도 없고, 죽어도 세금은 날아온다.


둘째, 자존감과 기여감이다.

일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조직이나

사회에 기여한다는 느낌. 그게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다.


셋째, 삶의 리듬이다.

규칙적인 직장생활이 삶에 긴장감과

리듬을 부여한다. 무기력함에 빠지는

걸 막아준다.


넷째, 지적 성장이다.

업무와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성장한다.


다섯째, 멘털 관리다.

소속감, 정체성, 활동성. 이것들이

부재할 때 오는 정신적 피폐함과

상실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노동은

그 모든 것을 막아주는 방패였다.




다시 무대로


깨달았다. 은퇴는 노동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무대를 바꾸는 것이라고. 60대

중반의 나이지만, 요즘 누가 집에서

무위도식하나.


무엇을 하든 일터에 나가는 것이

요즘 중년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처음 출근하던 날 기억난다.

다시 나의 루틴을 회복시켰다.

아침 4시 50분에 일어나 운동,

샤워, 단정한 옷을 입었다.


거울을 봤다. 눈빛이 살아있었다.

생기가 돌았다. "오늘도 이겨놓고 싸운다."

다시 찾은 것이다. 나를.




66세, 여전히 신입사원


66세. 나는 여전히 '노동하는 삶'을

통해 생존과 성장의 가치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무대를 계속해서

바꿔나갈 것이다.


백수로 지낸 석 달이 내게 가르쳐준 것.

노동은 돈벌이가 아니었다. 삶의 이유였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힘이었다.


많은 60대 동료들이 "이제 쉬어야지"

하며 줄을 놓는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쉬면 녹슬고, 녹슬면 무너진다고.

무대를 바꾸되, 줄은 놓지 말라고.


이 글을 읽는 내 중년 동료 여러분도

새로운 무대를 찾아, '진짜 노동의 가치'를

재발견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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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재취업 #새로운 도전 #인생 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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