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러면 불안하고 불행하기만 하니까
요즘 또래들의 이야기가 비슷하다.
졸업만 하면, 취업만 하면, 연애만 하면, 결혼만 하면, 성공만 하면..
그런데 이 레퍼토리 어디선가 들은 거 같다. 10년 전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랑 똑같다.
너 대학 가면 하고 싶은 해.
아마 지금 10대도, 내 선배들인 30대도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들었을 거다. 공부하면 미래 와이프가 바뀐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공부해서 정말 인생이 변했는가? 누군가는 정말 이성을 사로잡을 학력과 재력을 얻었겠지만 99%는 그러지 못했다. 와이프도 안 변했고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말을 이제는 스스로들 하면서 산다. 졸업만 하면, 취업만 하면, 연애만 하면, 결혼만 하면, 이직만 하면 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위에 것들을 하지 못해 있었던 불안감은 사라지겠지만 그 외에 것은 바뀌지 않을 걸, 말하면서도 알지 않을까. 불안이 없는 게 행복에 가깝다지만 배부르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처럼 무언가를 하지 못해 생기는 불안감은 끝이 없을 거다.
개인적으로 불안감이 끝이 없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이 단계들 간의 간격이 멀다는 거다. 취업은 잘하면 2년, 졸업은 무조건 4년으로 끝나지만 나머지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연애를 하고 싶어도 40년간 솔로로 살 수도 있고, 40세까지 결혼을 부르짖다가 다음 해에는 국제결혼 사이트를 뒤질 수도 있다. 시험은 내가 열심히 해도 남보다 잘 봐야 한다.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집은 어떻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당연히 얻어지지 않고 노력과 타이밍,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27 취업. 30 결혼. 32 이직. 34 주택 구매. 35 첫째. 39 둘째. 나름대로 타이트하게 ‘남들’처럼 살려고 해도 몇 년씩 비는 구간이 있다. 만약 여기서 남들 사는 대로 사는 구간을 몇 개 빼버리면 드라마틱한 사건들의 간격이 확 멀어진다. 27에 취업 후 32 이직까지 5년 동안 큰 이벤트 없이 지나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27 취업 후 한 직장에 오래 다녀서 승진이라는 이벤트 빼고는 별 일 없이 살 수도 있다.
별 탈 없이 한 직장에만 다닌 비혼 무주택자는 삶이 재미가 없을까. 불안감만 있을까.
인생을 단계와 결과로만 보면 그럴 거다.
나이라는 단계에 걸맞은 결과를 갖지 못한 게 당연하다면 그럴 거다. 하지만 당연한 건 없다.
예전에 커뮤니티에 나이별로 위인들의 업적을 정리해둔 게 있었다. 누군가는 20살이 되기도 전에 세계 정복에 나섰고, 누군가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세계적인 수학 문제를 풀었다. 누군가는 30살이 되기도 전에 억만장자가 됐다.
가끔 ‘이 모든 업적을 이룬 사람이 있으면 어떤 사람일까 ‘ 잡생각을 하곤 했다. 잡생각을 하다가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는데, 사람들이 하나씩 자기만의 업적은 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살다 간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30살에 억만장자가 된 사람도 10살에는 IQ가 낮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10살이 되기도 전에 세계적인 문제를 푼 사람은 4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 누군가는 80살에 치킨을 팔아 부자가 됐다.
한 가지를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이 과정들을 멀리서 멀리서 보면 꽤 재밌다. 사람들도 위인들의 인생을 보면서 재밌다고들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한 장면이 아니라 여러 장면들의 합일 거다. 치킨 팔아 부자가 된 순간이 아니라, 젊었을 때의 고생, 창업 실패, 가정사 그리고 성공. 그 과정의 종합일 거다.
우리가 장면만을 좋아한다면 영화나 소설을 왜 보겠는가. 섹스+마약+살인+도박+범죄 등을 1분마다 번갈아 보여주면 그게 최고의 스토리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인생은 과정을 즐겨야 재밌다. 쇼생크 탈출에서 탈출할 걸 알지만 영화를 보고, 범죄영화에서 경찰이 이길 걸 알지만 보듯이 대충 어떤 삶을 살지 예상은 되지만 이걸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즐기는 방법은 자유지만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보면 재밌다. 아 얘는 여기서 화를 내는구나. 뭐 때문일까. 쟤는 주인공의 조력자일까? 말을 이렇게 해서 오해가 생기는구나. 다음번에는 조금 다르게 말해봐야겠다. 다른 선택지도 있겠다 등.
힘든 현실에 대한 자위로 보일 수도 있겠다. 주변도 그렇지만 나 또한 그 단계들을 착실하게 계획하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의 취업. 서른 전후로 결혼. 서른 되기 전에 주택 구매. 마흔 되기 전에 자녀 2명 등. 최근 몇 주는 임장이라고 주말마다 아파트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고민하고 돌아다니는 과정은 꽤 재밌었다. 결과물은 안 나왔다. 아마 생각보다는 더 오래 걸릴 거 같다. 그렇지만 이 과정들은 꽤 도움이 됐다. 어떻게 부동산에서 말을 꺼내는지, 뭐를 봐야 좋은지. 대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보기도 하고. 사람들은 이렇게도 빚을 내는구나, 영 끌은 이런 거구나 등 많은 걸 찾아봤다.
재밌었다. 친구들은 내가 꽤 열심히 살고, 앞서간다고 했지만 나는 이 과정을 좀 즐겼던 거 같다. 모르는 세계가 또 이렇게 있다면서 몇 번을 감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실제 주택 구매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니까 그렇게 앞선 것도 아니고.
다들 과정을 조금 더 즐기면 좋겠다.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 밤을 새운 적이 꽤 많아 내가 글을 쓰면서 밤을 새울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을 할 때는 이렇게 상금만 타면서 사는 대학생활도 가능하겠구나 싶었다. 시간관리방법이나 잠을 쪼개서 자는 방법, 걸어 다니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일본에서 한국인 사장에게 쌍욕을 들으며 한 달을 버틸 때는 내가 이렇게도 버티는 인간이구나 발견했다. 이럴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도 감을 잡았다.
단계와 결과로 보면 대부분의 인생이 완벽하지 못하다. 누군가는 대입이 늦고, 누군가는 졸업이 늦고, 누군가는 취업이 늦고, 누군가는 결혼이 늦고, 누군가는 키가 작고, 누군가는 외모가 별로고, 누군가는 집을 못 사고 가지각색의 이유로 완벽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 불완벽이 다음 완벽으로 가는 거름이 된다면 나름대로 가치 있는 게 아닐까. 농구를 하는데 키가 작아서 분한 사람이 미친 듯이 드리블을 연습한다. 적당한 키였으면 분노가 생기지 않았을 거다. 외모가 별로인 사람이 공부로 무언가를 이뤘다. 뛰어난 외모였다면 외모 외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쉽게 들지 않았을 거다. 집을 못 사서 후회했던 사람이 분노하며 열심히 공부해 다음 타이밍에는 더 좋은 집을 샀다. 처음부터 괜찮은 집을 샀다면 더 노력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변 많은 젊은이들이 결과와 단계만 생각하며 산다. 대입 졸업 취업 연애결혼 주택 출산 은퇴. 그렇지만 우리는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10년 20년 전에 엄마 아빠는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스스로 한다니. 정말 취업만 하면, 아니 은퇴만 하면 행복할까.
아마 이 글을 쓰는 나도, 보는 사람들의 99.9%도 완벽하지 못한 삶을 살 거다. 그렇지만 그 완벽하지 못함이 완벽으로 가는 밑거름이 된다면, 그 밑거름을 쌓아가는 과정을 즐긴다면 조금 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거다. 사랑해 구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