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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Sep 26. 2022

고시원 8일차

1. 처음 고시원에서 주말을 보냈다. 주변이 업무지구라 그런지 카페도, 식당도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아서 본가에 갔다. 변명 같지만 피로 회복을 위해 헬스도 쉬었다.


2. 가기 전 근처에 콩국수 맛집이 있다고 해서 부리나케 갔는데, 생각보다 많이 아쉬웠다. 가격은 만원인데, 먹어본 어떤 콩국수보다 뛰어난 점이 없었다. 요즘 사람들은 콩국수 맛을 모르나 보다.

3.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데면데면하게 인사하고, 적당히 밥을 먹고, 적당히 짐을 챙겼다. 우산, 섬유 스프레이, 겨울용 바지 등을 챙겼다.


4. 소극적 복수인지, 예전 습관 때문인지 집에서 도저히 기운이 나지를 않았다. 저녁을 먹고 하루 종일 누워있다가, 낮잠을 자고, 또 일어나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새벽에 잠에 들었다.


5. 가장 좋은 길은 가장 쉬운 길이다. 전쟁을 멈추는 방법은 총을 더 쏘는 게 아닌, 사랑을 말하는 거다. 방아쇠에 걸린 손이 아닌, 손가락 하트가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 부모와의 관계 해결도 사랑이면 된다. 자식을 유기하는 부모가 아닌 이상,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으니까.


알면서도 부모님에게 잘 못하는 나를 보면 새삼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언젠가 이 글을 가족에게 공개할 때가 되면, 그때는 잘 지낼 수 있을까.

6. 늘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공부도 못하지 않았고, 취업도 빨리 해 걱정을 많이 덜어드렸지만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건,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게 굉장한 수고와 노력이 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맞벌이 두 분이면 굉장히 풍족한 생활을 했을 텐데, 늘 간소하게 식사를 하시고, 김치찌개로 몇 끼씩 해 드시는 건 그들이 맛을 몰라서가 아니다. 아껴 쓰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걸 모아두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일 거다.


취향, 패션, 향수, 맛집 등을 즐길 때 왜 우리 부모는 저렇게 재미없게 살까 싶었다. 조금 더 즐길 게 많은데. 왜 늘 무언가를 선물해도, 같이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할까.


아차. 저 재미없는 부모에는 나도 일조했다. 그들이 나를 위해 등하교시키고, 밥을 먹이고, 학원을 보내기 위해 아등바등 버텨내며 산 삶의 결과가 저거다. 군대에서는 선임 머리를 부지깽이로 깼다던 아버지가, 경찰에서는 라인에 밀려 승진을 못해도 정년까지 버틴 건, 일에 대한 자부심도 있지만 가장으로서 책임감도 있었을 거다. 격동의 8090년대 시위를 막던 어머니가 돌아와서는 형제들 밥을 챙기고 학원을 챙기며 소리를 질렀던 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조급해서였을 거다.


아버지는 늘, "네 자식에게나 잘해라, 사내 새끼라면 자식이 있어야 한다"  말한다. 정말 그거면 될까. 그러면 그전까지는 평생 미안해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우리 사이에는 조금 더 대화하고, 조금 더 안아주며, 조금 더 응원하는 일은 없을까. 이기적 유전자처럼 묵묵히 유전자를 이어 나가는 삶이 다일까?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중전'이라고 저장해둔 걸 볼 때마다 혼자 웃는다. 유튜브에선 네가 가질 수 없었던 그 아버지가 되라고 한다. 일주일 만에 집에 왔다고, 닭볶음탕을 해두었다고 아버지는 또 웃으신다. 미워할 수가 없다. 아무튼.


7.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고 나왔다. 차라리 고시원에 있는 게 낫겠다. 고시원에 도착하니 네시 반이었는데 카페는 거의 일곱 시에 닫고, 식당도 다 닫아서 애매했다. 고시원 방 안에서는 이제껏 시간을 안 보내봤는데 해봤다.

8. 영 별로다. 고시원 외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방에서 떠들고, 통화를 한다. TV인지 핸드폰인지 이어폰 없이 보는 거 같아 소음도 심하다. 그리고 방안의 텁텁함. 고시원 안으로 나있는 내창이 있지만, 건물 밖으로 통하는 외창만큼은 환기가 안 된다. 30분만 앉아있어도 텁텁함에 숨이 막힌다.


머리가 아파 침대에 잠깐 누워있으면 졸리다. 30분 정도 자면 30분 정도 다시 할 수 있고, 다시 30분 뒤면 숨이 막힌다. 이렇게 3번 정도를 반복한 거 같다. 다행히 마지막에는 3시간 정도 집중할 수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9. 대충 구성비가 한국인 40대 이상 남성 30% 2030 한국인 남성 30% 20대 외국인 남성 20% 20대 외국인 여성 10% 2030 한국인 여성 10%쯤 되는 거 같다. 외국인들에게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패츌리 계열 향수는 안 뿌려도 되겠다.


10. 단기 알바를 했다. 학원에서 교재 및 박스를 나르는 일이었다. 방에서 너무 떨어진 곳에서 하기는 싫어서 어필을 많이 했는데, 귀 학원의 다른 지점에서 알바를 했다는 걸 적었다. 4년 전 토익 910점, 2년 전 850점 등도 적으려다가 민망해서 적지 않았다. 나중에 아르바이트용 프로필을 따로 만들어야겠다. 정규직이나 인턴이 단기 아르바이트에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11. 친구가 너처럼 야생에 나와 사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민망했다. 회사에서 못 버텨서 나온 거고, 부모와 사이가 좋지 못해 나온 거뿐이다. 가장 좋은 답은 회사에 잘 적응하는 거고, 부모와 잘 지내는 건데 그걸 못해 더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돌아가면서 직장인일 때의 미래계획도 이제는 전부 초기화됐다. 내가 참지 못해서다. 야생에 나와보니 내가 열심히 했다고 했던 일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하에서, 직장이라는 사회 하에서 이루어진 게 전부라는 게 느껴진다. 직장은 지옥이라지만, 밖은 야생이다.


12.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20대 초반이다. 아직 취업이나 창업보다는 회식, 술, 연애 이야기를 한다. 취준 커뮤니티, 고시원 커뮤니티라도 만들어야 할 거 같다.


13. 지원은 밤에 해야 한다. 예전에는 깐깐히 골랐다. 여기는 BM이 어떻게 되지, 구성원은 몇 명이지, 투자는 받았나, 팀원 구성은 어떻지, 기사는 어떻게 나왔지. 다 찾아보고 나서야 지원했다. 그래서인지 합격률이 괜찮았던 거 같은데, 이제는 되는대로 지원한다. 합격률은 더 낮아졌지만 그래도 따지기보다는 하는 게 낫다.


그래서 밤에 지원한다. 낮에는 생각이 많아 안 되는데 밤에는 걱정이 많아 지원이 잘 된다. 무서워? 쪽팔려? 안 될 거 같아? 돈 못 버는 게 더 쪽팔리고 무서워.


끝.


고시원 생존기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 '돈은 없지만 독립은 하고 싶어'로 깔끔한 디자인과 멋진 표지로 재탄생했습니다. 많관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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