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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Nov 13. 2022

아낄 걸 아껴야 하는데

고시원 55일차

1. 기사식당 할머니는 이제 말을 안 해도 안다. 안녕하세요 인사만 해도, 총각 불백이지 하고 받아준다. 하루는 경찰이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다. 매일 검정 잠바에 깔끔한 머리를 하고, 비슷한 시간에 밥을 먹으러 와서 물어봤단다. 순간 식당 할머니가 의경 단화를 알아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2. 가격적으로 만족했던 헬스장은 그거 외에는 다 불만이다. 기구가 너무 적고, 사람은 너무 많다. 기구도 구식이다. 아침에는 출근 전 들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수건이 부족할 때가 많다. 이제는 세탁실에서 알아서 가져오지만 처음에는 당황해서 사람들이 바닥에 흘린 수건 중 덜 축축한 거를 가져다 썼다.


2-1. 최근에 이번 달 토요일은 다 쉰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이거를 금요일 오후에 보냈다. 중소기업식 샤우팅 공지도 아니고, 휴일 날짜 변경을 전날에 공지하다니. 엉망이다. 그래서 오늘 서울 구경을 하기 전 오랜만에 주말이라 열심히 운동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씻지를 못해 아침에 부스스한 머리 만지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고시원에서 씻을 준비를 갖춰놓는 게 좋을까?

2-2. 마감시간 1시간 전 운동하는 사람은 거의 나밖에 없다. 가끔 젊은 남자 1~2명이 있긴 한데, 1주일에 5일 다 채워서 오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헬스장 사장도 아무도 없는 거 같으면 마감 20분 전부터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하루는 마감 10분 전 씻고 있는데 샤워실 불이 꺼져 당황했다. 겨우 수건을 찾아 말리고, 입구로 나가 사람 있다고 외쳤다. 웃통을 벗고 수건으로 아래만 가리고 사람 있다고 외치는 것도 민망하긴 한데, 재밌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 있는 티를 내려고 샤워할 때 혼잣말을 많이 한다. 어차차차. 씻어야겠구나. 나가야지. 잘 먹었네. 하하하.


중년이 되면 "택배가 왔나 보구나 ♬" 혼잣말이 늘어나는 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발버둥이 아닐까 싶었다.


3. 오랜만에 서울 구경을 했다. 회사 도서관 헬스장 고시원만 반복하다 보니 오히려 시각이 좁아지는 게 느껴져서다. 책이나 영상은 좋은 도구지만, 실제 현장이나 사람들을 보고 대화하는 거만큼은 몰입감이나 현장감이 떨어진다.


전날 헬스장이 샤우팅 공지를 한 것부터가 문제였는지, 쉽지 않은 하루였다.


4. 가방에 과자, 닭가슴살, 음료 등을 가득 챙기고 나갔다. 브랜드를 하나 구경하기로 했는데 인스타그램 공지를 보고 갔더니 오픈 시간이 바뀌었단다. 뭘까. 내가 잘못 본 건가, 얘네가 잘못 공지한 건가.

5. 앉아서 비스킷과 음료를 먹고 뭘까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무난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브랜드와, 팝업스토어를 구경하고, 중간중간에 닭가슴살을 주워 먹고 또 구경하고, 또 잠깐 먹고, 또 구경하고 그랬다. 나름의 무지출 데이를 달성하고자 했다. 만약 길거리에서 닭가슴살을 먹는 사람을 본다면 필자라고 의심해도, 그냥 지나쳐주기를 바란다. 23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먹어서 익숙하다.


6. 오늘 무지출의 가장 큰 적은 비였다. 어제 아이폰 앱으로 봤을 때는 저녁 7시까지만 비가 온다길래, 그 사이사이에 실내에 잘 들어가 있으면 우산이 없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 회사에서 받은 우산을 헬스장에 들고 갔는데, 까먹고 이틀 뒤에 갔더니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 회사에서 받은 거라 잘 사라진 건가. 또 우산을 언제 본가에서 가져오나 귀찮아서 안 챙기고 있었다.


7. 다행히 저녁 7시까지는 사이사이에 실내에 잘 들어가 있었다. 비를 거의 안 맞았다. 이제는 비가 안 오겠구나 싶었는데 7시 30분부터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폰 앱을 보니 12시까지 온다고 되어있었다. 저번에 아이폰 앱이 맑다고 했는데 비가 온 적이 있어, 친구가 믿지 말라고 하길래 소신대로 그칠 거라고 믿고 나갔다.

5분쯤 걷자 옷이 다 젖었다. 신발에서는 질척거리는 질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때 느꼈다.


처음부터 우산을 살 걸

8. 그래도 소신대로 10분 정도는 더 비를 맞고 걸었다. 귀여운 신발들도 발견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옷이 무거워지기까지 해서 이제는 우산을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점심 저녁 다 잘 때웠는데 우산으로 몇천 원을 쓰는 게 너무 아까워서 참았다. 그런데 이러다 내 옷 내 신발, 내 책, 내 이어폰 등이 다 망가질 거 같았다. 이미 우산 값보다 많이 물건들의 수명이 줄었는지도 모르겠다. 우산을 사는 김에 오늘은 담배를 더 펴야 할 거 같아 담배까지 사버렸다.


9. 마지막 유니클로까지 구경하고 바로 버스를 타고 본가로 갔다. 글을 쓰는 지금으로부터는 3시간 전이다. 옷은 축축하고, 신발은 축축 수준이 아니었다. 거의 물에 담근 수준이었다. 물웅덩이도 많이 밟았으니 뭐.

구경은 잘했지만 스스로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뭐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뭐에 투자하고 투자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걸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미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다니.


앞으로 우산과 충전기는 무조건 여벌로 챙기기. 많이 반성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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