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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Nov 19. 2022

고시원 60일 차

무미건조한 날들

1. 사회인의 호흡은 느리다지만 걱정이 들 때가 있다. 두 달 뒤에는 원룸으로 옮겨야 할까.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까. 10년 뒤, 아니 1년 뒤에는 내가 어떤 모습일까. 6개월 전의 나한테 "너는 스타트업 가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혼자서 고군분투하면서 일할 거야"라고 말하면 나도 안 믿었을 거다. 마음은 급한데 내 성장 속도가 느려서 불안하다.


2. 식비가 애매해 1일 1끼를 해서인지 먹는 양이 꽤 졸었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서 고깃집에 갔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못 먹었다. 잘 못 먹던 고기라 많이 먹으려고 했는데 신기하다. 오히려 슬림한 몸을 유지할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닐까.

3. 헬스장은 이제 좀 즐겁다.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걸 줄이니 마음도 편하고 사람들 구경하는 맛이 있다. 회사원처럼 입는데 금반지와 금팔찌를 하고 있는 신기한 아저씨. 서로 등에 로션을 발라주는 아저씨들. 사람 구경을 헬스장에서 한다.


4. 바퀴벌레를 오랜만에 봤다. 방문 앞에 배 까고 누워있길래 깜짝 놀랐다. 누가 죽였으면 치워주면 좋을 텐데. 발로 반대쪽으로 차니, 10분 뒤에 다시 내 방문 앞으로 왔다. 다음날 출근할 때까지 보고, 퇴근할 때는 없었으면 기도했는데 다행히 퇴근할 때는 없었다.


5.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꿈을 꿨다. 예전에도 몇 번 언급했던 코인을 하는 친구다.

뭐라고 고민상담을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었나 보다. 그 전후로 또 꿈을 꾸었는데, 어디 음식점에 갔는데 안 친한 대학 동기가 사장인 꿈이었다.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사장님 소리 듣는 동기를 보니 꿈에서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요즘 불안한 건가. 누군가를 질투하는 건가.


6. 민망한 이야긴데, 예전에 애인과 꽤 크게 다툰 적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나는 말을 꺼낼 때 꽤 천천히 고민해서 꺼내는 타입인데 애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끊기면 어떻게라도 말을 꺼내는 애인을 보면, 나는 또 고민하다가 말을 삼킨다. 그래서 하루는 너무 힘들었는데 애인이 계속 말을 하길래, 말을 포기하고 아는 미용실에 갔다. 거의 1년 만에 방문하는 곳이었다. 예전 머리스타일이 어떘는지 기억하고, 학생이었는지, 직장인이었는지도 기억하신다. 애인이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메모를 잘하나?


아무튼. 거기서 한 시간 정도 떠드니 꽤 기분이 좋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말은 했으니까. 후에 애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충격 먹었는지 그다음부터는 약간의 정적도 기다려준다. 4번을 쓰다가 생각났다.


6. 그래도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좋지만 고민하고 나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조금 꺼림칙하다. 2년 넘게 만난 내 애인보다도, 어쩌면 하루 날 잡고 내 글을 쭉 읽게 시키는 게 나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게 정상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약해질까 봐 약해 보일까 봐 늘 익명으로 글로만 쓴다. 만약 내 애인도 이렇게 생활하고 있다면 조금 서운할 거 같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고민하고 친구를 만나 떠들고. 배달음식을 먹고. 약간 부족한 자기 관리를 하고. SNS에 약간은 집중하고. 환승 연애와 나는 솔로를 주 1회마다 기다리는. 울고 웃고 감정에 충실한 그런 사람이 좋다. 그 사람도 분명 모든 감정과 생각을 말하고 다니진 않겠지만 나처럼 인터넷에 500개가 넘는 글을 쓰지는 않았을 거 같다.

7. 글을 힘들 때 쓰는 거 같다. 좋은 건 그냥 사진 간단히 찍고 온전히 누리려고 하는데, 힘든 건 극복하기 위해선지 안 겪기 위해선지 계속 곱씹는다. 애인은 사진을 찍어두고 꽤 자주 보며 추억을 떠올리지만, 나는 사진을 찍고 보지는 않는다. 그냥 다음 쓸 글을 고민할 뿐. 요즘 글이 초기보다 드문 건 이제 힘든지, 좋은 지도 조금 무감각해졌기 때문인 거 같다.


8. 최근 비를 크게 맞았다. 오다 그치고 오다 그치고 했다.

저녁 7시쯤 한 중년 커플 중 아저씨가 우산을 던져 버렸다. 옆에 아줌마가 놀라 왜 우산을 버리냐고 묻자,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혹시라도 누가 비 맞을 수 있잖아. 우린 두 개니까. 답했다. 그럴 거면 진작 버리지 비 다 그쳤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30분 뒤에 또 비가 장대같이 쏟아졌다. 낭만적인 아저씨였다. 주울 걸.


9. 비가 오니 운전이 험악하다. 친절하게 인사해주던 버스기사님도 차가 끼어들자 화를 못 참고 10분 넘게 씩씩댄다. 뒤에 아줌마는 굳이 또 어디 어디 서는 거 맞죠 묻는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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