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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Dec 01. 2022

스타트업 50일차

시간이 빠르다

1. 시간이 정말 빠르다. 50일이 되고 뒤를 돌아본 느낌이 아니라,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웹서핑할 시간조차 없다. 막상 돌아보면 한 게 많지도 않은 거 같은데 일을 쳐내는 것만으로 벅차다.


2. 꽤 적응했다 생각하다가도 다이어리를 보면 받은 피드백과 새로 알게 된 사실들로 반 이상이 채워진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


3. 20일차 글이 있었는데 지웠다. 적응단계라 바쁘기도 했고, 감정이 정리가 잘 안 된 상태였어서 공격적인 글이었다.

4. 회사에 대표의 친인척이 있었다. 지금은 없다. 방학기간에 인턴 아닌 인턴을 하는 듯했는데 그 친구와 호흡을 맞추는 게 잘 안 돼서 일 사이사이에 빈 틈이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비판과 피드백을 내가 들었다. "쟤가 했는데요" 말하려다가도 말하면 뭐하나 싶어 그냥 죄송하다고만 했다. 쟤가 잘못한 걸 내가 혼나고 있는데 뒤에서 하하 웃으며 지나갈 때는 참.


5. 잘못 업로드된 파일이 있었다. 대표가 공격적으로 말했다. 이거 네가 한 거니 구안아. 한 기억도 없는데 혼나는 건 싫어 업로드한 사람 이름을 봤다. 그 친인척이었다. 제가 안 했습니다. 제가 한 거는 다 똑바로 되어있습니다. 그 친구가 한 거랑, 제가 한 거랑 해서 잘 되어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이상 있으면 수정하겠습니다, 답했다. 답했지만 느꼈다. 이 회사 모든 실수와 비효율을 돌릴 적을 찾고 있나?


6. 이면지 박스가 없어 그냥 A4 박스에 넣어두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구안아. 너 왜 여기 넣어놨어. 대표가 따지듯 물었다.  원래 거기 넣어두시는 거 같아서 넣어놨습니다. 원래는 박스가 있었단다. 내가 왔을 때는 없었다고 했더니 돌아간다. 박스가 없는 건 보면 아는 건데.


7. 오늘도 파일을 보여주기 전에 대표가 보기 편하게 몇 가지를 추가하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늦냐고 물었다.  그냥 가져오지, 뭘 또 추가하냔다. 대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에 공동대표가 목소리 낮춰. 구안이가 맞게 하고 있네. 말했다.

8. 이런 케이스가 꽤 많아 사람이 점점 위축된다. 하루에 한 번 이상이다. 실수를 많이 했나? 평범한 신입이 하는 정도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친인척이 한 실수를 얹고, 대표의 불안과 의심을 얹으면 실수가 더 늘어나서 평소의 3배가 된다. 많이 한 거 맞구나.


9. 양식을 새로 만들자거나, 00를 하자거나 건의할 때도 지금은 바쁘니 있는 일부터 잘하자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혼나고 거절당하는 일이 칭찬받은 일보다 많으니 이제 도전조차 안 하게 된다. 개선의 여지가 있는 일도 따지고 들어올 게 귀찮아 그냥 해버린다.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했냐고 하면,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했는데요. 해버린다.


10. 상품정보를 볼 수 있는 QR을 만들었다. 네이버 카메라로 찍으면 볼 수 있는 건데, 3시간 넘게 검색해 엑셀에서 여러 함수를 종합해 만들었다. 대표가 한 말은 이거 활용할 수 있겠네. 우와. 네이버 역시 대단하네. 였다. 뒤에서 하하 웃으며 생각했다. 뭘 해야 이 사람들은 나를 인정할까?


11. 그래도 배운 것도 많다. 바쁜 대표의 시간 속에서 끼어들어 질문하는 법. 눈치껏 회사 분위기를 파악하는 법. 욕받이를 이겨내는 법. 아 이건 아닌가?


12. 도구가 없어 잘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나는 정석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 친인척이 더 효율적인 게 있다면서 이상한 방법을 사용한 거였다. 최근 회사에 도구를 도입해서 그 도구를 사용해 다시 하겠다고 했다. 대표가 물었다. 그전에 했을 땐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알겠다고 했다. 이런저런 게 잘못됐다고 답했다. 그게 아니란다. 구안아 너는 아직도 네가 뭘 잘못한 지를 몰라. 구안아 네가 잘못한 건 말이야.


한참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다시 도구 사용해서 하면 될까요?


그러란다.


10분 가까이 적개심과 의심을 받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 새벽 3시까지 마감 아르바이트를 했고, 일본에서는 한국어로 듣고 일본어로 서빙하며, 고기를 잘랐다. 사장은 6시간 넘게 욕을 했다. 시발 구안아 뭐하냐. 정신 안 차리냐. 새끼야 돈 받기 싫어? 욕을 듣고 웃으며 손님에게 니쿠오 키리마스(고기를 자르겠습니다) 이 쇼를 매일 했다. 강하게 키워준 건 생각해보니 가혹한 사장들이었다.

13. 회사에서는 웃으면 안 된다. 회사에서 꽤 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20분 설명해주고 이제부터 내가 담당자라고 했다. 물론 중간에 엿들은 게 있어서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았는데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꽤 많이 물어봤는데 대표가 중간에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담당자면서 아직도 파악이 안 됐어? 이게 무슨 의도로 하는지?


당연히 앞선 2번의 회의에도 참가시켜주지 않고, 지금 막 받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오히려 대표의 태도에 내가 놀라서 웃어버렸다. 당연히 미소는 아니고 썩소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저번 회사에서도 어떤 회의에도 껴주지 않고, 회의록도 안 주면서, 내가 담당자라고 해서 우왕좌왕 일했는데 매번 혼날 때마다 "담당자면서"라고 말해서 너무 웃겼다. 한 번은 그게 얼굴로 드러나 웃냐면서 혼났는데 웃긴 걸 어쩐가. 회사가 참 웃긴 곳이다. 위에서 다 정한 후에 담당자만 정하면 모든 책임이 담당자에게 간다.


14. 나라면 어떻게 할 거냐면. 일단 지금까지 임원들이 나눴던 대화 내용과 주고받은 것들을 전부 취합해 나에게 줄 거다. 기획의도부터 필요한 기능. 프로토타입의 형태. 이미지. 이후 개선사항. 사용자가 추후에 필요한 것들 등. 한 번에 정리하고 그다음에 프로토타입 제작에 들어갈 거다. 정리는 하루면 된다. 정리하고 인사이트를 적는 행위만 몇 년을 했다. 그리고 판교 입성이 꿈이라 나는 요즘도 기획자로 일하는 법을 검색해 본다. 나 같은 저렴한 고급인력이 어딨는가.


텍스트로 정리가 되면 모두와 공유가 되고, 이는 내가 없어도, 대표가 없어도 굴러가게 만드는 바이블이 된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것과, 당장은 필요 없는 것, 미래에는 꼭 필요한 것 등도 나눠서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것들만 넣어 빨리 제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만히 있는다. 나는 공공의 적이니까.


15. 하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단순 업무만 했다. 아무 일도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집 가는 길에 생각했다. 스스로가 일용직 노동자 같았다. 성장하기 위해 왔는데 단순업무로 하루를 마쳤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부끄러웠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래서 오늘은 퇴근하라고 했지만, 마무리하고 싶어서 한 시간 정도 더 남아 일을 마무리지었다. 뿌듯했다. 기분 좋아서 이렇게 글도 적고 있지 않은가. 역시 얌체같이는 못하겠다.

16. 신입이 들어왔다. 이 사람도 혹시 친인척일까 싶어 뭘 물어봐도 시큰둥하게 대꾸했다가 아닌 거 같아 어제, 만든 매뉴얼을 공유했다. 혼자서 주워 들었던, 부딪히며 배웠던 걸로 만든 15P정도의 매뉴얼이다. 프로그램부터,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순서로 하면 좋은지, 누가 누구인지, 연락처 등이 적혀있다.


17. 토스는 성장하면서도, 일이 넘치면서도, 퇴사자가 많으면서도, 애사심이 넘치는 곳이다. 대표가 직접 하는 온보딩과, 파트너 프로그램 덕이 크다고 생각한다. 신입이 늘면서 생기는 처음의 그 공백과 사람들의 무관심에서 오는 무력감, 적응하면서 생기는 실수가 많다는 이미지를 완전히 극복해 원팀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을 그 원팀으로 만들까. 아니면 포기할까. 평소의 나였으면 후자를 택했겠지만, 공공기관을 나와 이미 고시원에서 산다는 것부터 엉망인 선택이므로 전자에 가까운 선택들을 하고 있다. 그래도 기존보다 30% 가까이 준 월급을 보니 숨이 막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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