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일하는 걸까
1. 해고당한 후 고민이 많다. 스타트업이라는 선택은 좋았던 거 같은데 뭐가 문제였을까. 다른 스타트업은 다를까. 공공기관을 괜히 나왔을까. 이제는 뭔가 도전하기에는 늦었나.
2. 가족이 전부 공무원이면서 공무원을 택하지 않았던 건, 공무원이 된 이후의 삶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까이엔 가족이 있었고, 사오 년 전 공무원 현직자 카페 등을 보면서 생각보다 만족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한 번 들어가기도 어려운데, 만족하지 못할 거라면 계속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3. 공공기관을 나온 것도 생각보다 루틴하고, 새로운 일을 하는 데 내 의견이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적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4. 당시 취업은 일찍 했는데, 잘 적응 못한 내 잘못인가 했는데, 어떻게 보면 처음 선택부터가 잘못이었다. 인사전문가가 이런저런 취업이나 회사생활에 대한 걸 알려주는 <퇴사한 이형>이라는 채널이 있다. 도전하고 싶은 사람이 공공기관에 간 거 자체가 미스였다는 영상이 있었다.
5. 해고당했다는 글을 적자 회사를 욕하고 나를 응원해주는 댓글이 많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회사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대표 입장이었으면 안 맞는 직원은 쳐내는 게 맞지 않은가.
내가 대표였어도 나를 잘랐을 거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잘 안 맞는 인간이었으니까.
가끔 이렇게 빙의하곤 한다. 전 회사 팀장이었으면 이렇게 했겠지. 대표였다면 이렇게 했겠지 등. 이건 꽤 좋은 습관이 됐다.
6. 요즘 고민은 네 가지다.
(1) 큰 스타트업에는 당장의 실무능력이 없어 어려우니 작은 회사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회사에서 작은 일부터 해서 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표가 그런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지. 작은 일이니 그냥 쓰고 버려야겠다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건 영향력 밖의 일이다.
(2) 미생에 이런 장면이 있다. 오 과장과 선배가 회사를 만들었다. 대표인 선배는 계약직이 끝난 장그래를 자신의 회사에 싼 맛으로 데려오자고 한다. 그때 오 과장이 화를 낸다.
장그래는 잘하는 친구니 좋은 사수가 있고 좋은 후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클 수 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당연히 사수와 선배가 있고 잘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면서 성장하는 게 회사 아닌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저번 회사는 팀에 둘 뿐이었고 사수와도 10년 정도 차이가 나서 제대로 뭔가를 전달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니어서 혼자 고민하며 일했는데,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피드백이 없어서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잘하고 있는지 계속 의문을 가졌다.
스타트업은 다를까 했는데 전부 임원이었고 사원은 나 혼자였다. 사수랄 게 없었다.
생각해보면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 성장성도 동시에 가지는 회사는 흔치 않겠다. 결국 회사도 사람이 만든 거니 빈틈이나 오류가 꽤 많다.
(3) 또 미생이다. 장그래가 일하면서 겉멋 든 이야기를 하자, 선배들이 돈을 주고 장사부터 하라고 한다. 장그래는 양말을 사 지인에게 판다. 그러다 깨닫는다. 상품성이 없는 걸 인맥으로 파는 게 무슨 소용이지.
100억 매출의 브랜드 세터도 말한다. 처음에는 브랜딩이나 사업이 아니라 장사라고. 그저 또 오세요. 반갑게 인사하고, 손글씨로 정성을 표현하고, 친밀하게 다가가는 게 다라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가 사업인가? 장사인가? 스타트업인가?
(4) 일을 좋아할 수 있을까?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하면 행복할까?
애인이 취업 이야기를 했다. 패션을 전공한 애인은 대기업을 가고 싶지만, 디자인은 색다른 걸 하고 싶어 한다. 대기업은 디자인이 조금 심심하단다. 아마 패션을 남들보다는 깊게 좋아해서 그런 걸 테니 이해는 된다.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해 무언가를 팔면서 일한다는 건 대중에게 맞춰야 하는 일이다. 불독 그려진 <라이프워크 lifework>라는 브랜드가 있다. 가끔 백화점에 가면서도 크게 관심을 안 가졌는데, 한 해 매출이 1500억이다. 그에 비해 핫하다고 하는 세터의 매출은 100억이다. 100억도 크지만 SNS에서 유명하다고 했는데도 매출 차이가 이렇게 크다.
LF와 삼성물산, 코오롱이 바보 멍청이들이라서 산산기어, 마뗑킴, 포스트아카이브팩션, 세터 같은 브랜드를 못 만드는가. 아니다. 그게 큰 회사를 굴러가게 할 만큼의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안 하는 거다. 핫하다는 건, 무난하지 않다는 거고, 무난하지 않다는 건 소비자가 많이 없다는 거다. 그리고 돈이 안 된다는 건 다른 스트레스도 많은 회사에서 매출이나 수익도 엄청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일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몸을 갈아넣어 일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개성을 살린 디자인을 한다는 건, 타겟층이 한정되어있다는 거고 성장성도 그렇게 높을 수는 없다는 거 아닐까. 매출을 늘리기 위해 대중에게 너무 맞추려고 하는 순간 경쟁자는 대기업이 되고, 개성을 강조하면 대중과는 멀어진다. 그래서 10년 넘게 브랜드를 유지하는 걸 어렵다고 한다.
국내 1등이라고 생각하는 디스이즈네버댓이 10년 넘게 해 매출이 250억인데, 2년 한 세터가 100억이라는 건 좀 놀랍다.
어떤 걸 많이 좋아한다는 건 세상 과반수와는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건데, 이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건 세상 과반수에게 어필이 안 된다. 그러면 좋아하는 걸로 일을 한다는 게 가능한 걸까?
7. 해고당한 다음 날 했던 건, 대표들의 SNS를 전부 보는 일이었다. 브런치에서 타 직업의 인터뷰도 엄청 찾아봤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처럼 영향력을 가지고, 일을 하고, 돈을 버는지 궁금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읽다가 깨달은 건 결국 이렇게 읽을 때가 아니라 실행해야 될 때라는 것뿐.
8. 사장처럼 생각하며 일하고자 했다. 청소나, 사소하지만 잡다한 것들 하나하나 신경쓰려고 했다. 저건 돈을 쓰는 거구나. 이렇게 하면 사람을 움직이는구나. 멈추는구나. 이건 이런 이유에서 하는 거겠지. 이런 물건이나 시스템이 필요하겠구나.
작은 회사라 회사의 이런저런 서류도 볼 수 있었고 좋은 경험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사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솔직한 이야기지만, 스타트업에서 일하고자 하는 건 대표처럼 너무 많은 일을 하기는 싫고 큰 리스크도 지기 부담스러워서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고자 했다. 언젠가 내 일을 하고 싶지만 그게 당장은 두려워서 돌아서 가는 중이다.
9. 예전에 회사가 싫어 사업하겠다는 애들을 철없다 비웃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그런 인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10. 내가 정말 스타트업에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인가. 그냥 그 성장과 성공, 노력의 이미지만을 부러워하는 건 아닐까.
11. 계속해서 글을 본다. 계속해서 새 프로그램이 나오고, 새 기술들이 나온다. 이걸 다 익힐 수 있을까. 에버노트 이야기는 들어갔고, 이제는 노션 이야기도 들어가고 있다. 잘하려면, 자라려면 배워야겠지.
12. 회사에 대해 가진 환상이 너무 컸던 걸까, 학교 다녔을 때처럼. 학교가 토론과 배움의 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교재를 달달 외워야 점수를 주는 과였다. 동기들은 이 교수는 이런 답변 스타일을 좋아하고, 작년에는 이런 주제가 나왔으니 그건 빼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마이갓. 적다보니 이거 완전 위에 대기업이 무난한 디자인을 뽑아낸다는 이야기랑 결이 같다. 평가가 좋으려면, 평가자에게 잘 맞춰야 한다.
주관식을 제출했을 때 교수가 한 말은, 글씨를 이렇게 쓰면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거였다. 맞는 말이긴 하다. 아무튼 그래서 손으로 안 쓰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긴 하니.
회사도 어떤 성장과 문화, 자기실현의 장이 아니라 그냥 돈 버는 곳. 그 자체일 뿐인데 너무 기대하는 게 아닐까. 사회생활 하기 싫어 내 일 한다는 친구들이 요즘따라 대단해 보인다.
13. 회사 글을 적자 그런 회사는 망한다는 반응이 좀 있었다. 좋게 헤어진 건 아니지만 짧게나마 있었던 곳이니 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관심 있게 본 스타트업은 거의 다 잘됐다. 3년 전 토스에 넣었고. 올해는 부동산이랑, 반도체 스타트업에 넣었다. 반도체 스타트업은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지만, 그 회사는 한 달후 100억 넘는 투자를 받았다.
14. 제안 메일도 하나 왔고, 관심 있다는 댓글도 달렸다. 감사한 일이다. 고민하고 있다. 어떤 회사에서 일해야 할까. 그 회사는 어떤 회사여야 할까.
스물여덟 백수에서, 스물아홉 백수가 다가오고 있다.
끝.
아. 그래서 오늘 쓸데없는 짓을 하나 하긴 했다. 이거 하느라 오전을 거의 다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