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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Dec 05. 2022

회사 잘렸습니다

스타트업 55일차

1. 홈페이지 제작을 위해 접속하려는데 비밀번호가 틀렸단다. 신입에게 물어보니 비밀번호를 안다고 해 대표에게 받았던 메시지 전체를 전달해달라고 했다. 거기엔 바뀐 비밀번호가 있었고, 한 문장이 더 적혀있었다.


다른 팀원에게 공유 금지

팀에 나랑, 신입, 그리고 대표들밖에 없는데 공유 금지라는 건 내가 보지 말라는 의미인가?


2. 일에 손 떼라는 거 같아 하루 종일 사무실 정리만 했다. 오전 내내 했는데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고, 중간에 대표가 들어와 인사했는데도 대표는 받아주지 않았다. 오후 늦게까지 사무실 청소만 했는데도 아무도 찾지 않았다.


3. "다른 팀원에게 공유 금지"라는 문장을 보자마자 느꼈다. 조조에게 빈 그릇을 받은 순욱의 마음이 이랬을까.


4. 대기업에서 퇴사시키기 위해 잡무를 시키거나, 책상을 빼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이구나. 그래서 나도 때가 온 거 같아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청소만 했다. 이렇게 남은 수습기간을 채워야 하나, 정말 이렇게 나를 한 달 동안 둘 생각인가?

5. 신입에게 점심을 같이 먹으며 무슨 이야기 들은 거 없냐고 하자 애매한 표정으로 모른다고 한다. 아마 알지만 모르는 척해주는 거 같다.


6. 퇴근 10분 전 대표가 불렀다. 고생한 건 알지만 이쯤에서 서로 정리하는 게 좋겠단다. 조만간일 건 같았지만 당일일 줄은 몰랐는데, 미리 짐 정리나 데이터 정리를 어느 정도 해둬서 다행이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부족해 죄송하다는 말에, 더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했다.


7.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조금 더 사근사근했어야 했나. 쟤가 실수한 건데요. 따져야 했나.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해야 했나.


8. 가장 마지막 계기는 금요일일 거다. 대표가 시킨 일을 마무리하고, 신입과 인턴에게 해야 할 일을 주고, 마지막으로 지난날에 못했던 걸 마무리하고 있었다. 대표는 왜 이걸 하냐고 했고, 나는 미리 정리해두면 편할 거 같다고 답했다. 이러면 다른 거랑 통일을 못 시킨다는 말에, 저번에 혼잣말로 말씀하셔서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았다고 답했다. 왜 상식적으로 일을 안 하냐는 말에는 답을 못 찾았다. 민망하게도 나도 하면서도 이게 애매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또 뭔가 만들어 하냐고, 딴 거나 잘 하라는 말을 들을 거 같아 후딱 마무리하려고 한 거다. 그 전까지는 있었던 일들을 잘 쳐냈고, 신입이 구안님 정말 일 잘하시네요. 라고 하기까지 했다. 내 잘못이다. 하나라도 애매하면 물어봐야 했다.


9. 여기서 상식은 일 센스 정도를 의미하고, 다른 말로 하면 회사 문화 정도가 될 거다. 이 회사 문화와 일 센스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 다르지 않을까. 같은 문화를 공유하지 않으면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문화를 공유할 시간이나 계기가 있었던가. 대표가 만족스럽다던 신입도, 내가 중간에 두세 번 봐주지 않았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았을 거다. 프린트하는 법, 포장하는 법 등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두세 번의 실수를 반복했을 거다.

10. 오늘도 저거 실수할 거 같은데, 생각했던 게 있는데 정말 생각대로 실수했다. 그래서 홈페이지의 자료들이 다 날아가서, 복구하느라 개발업체에게 연락해 대표의 에너지를 써야 했다. 과연 '상식'을 전달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였다.  


11. 이렇게 생각하면 회사 사람들이 내 글을 보지는 않는 거 같다. 내 실수가 아니라고 했고, 이 회사에 좋은 문화를 가져오게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데 바로 다음 주에 자르다니. 아니면 글을 보고 너무 건방지다 생각해서 자른 걸까. 뭐 어찌 됐든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지속되면 나도 다른 회사를 알아보려고 했으니까.


12. 모든 방안을 다 써보려고 했다. 일 잘하는 척. 소심한 척. 당당한 척. 모든 걸 물어보는 척. 거의 다 사용했다. 그런데도 안 통했다.


업계 공부를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티도 많이 내서 후회는 없다. 유튜버 뉴욕 주민은 말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노력뿐이니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고,


13. 돌이켰을 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대표의 친인척이 왔을 때 거리를 두지 말고 오히려 친해져서 일을 같이 잘해야 했다는 거다. 괜히 거리 두고, 따로따로 일을 하다 보니 빈틈이 많이 생겨 그 모든 책임이 나에게 왔다. 대표가 마지막 가는 길 사회생활 선배로서 하는 말이라며, 자신들은 더 힘든 일도 많았는데 성장의 계기가 됐다고 했을 때,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맞는 말이었다. 지금 좋은 회사 문화들이 잘 퍼져있는 건, 10년 20년 전 아직 개선되지 못했던 문화들 덕분이었다. 10년 20년 전에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을까. 당연히 작은 회사면 어떤 일이든 생길 수 있는데 그걸 예상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




고시원 생존기가 좋은 출판사를 만나, '돈은 없지만 독립은 하고 싶어'로 깔끔한 디자인과 멋진 표지로 재탄생했습니다. 많관부탁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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