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충분해
저번주에는 애인의 생일이 있었다. 필자에게는 일 하나를 잘하고 집중하기에도 정신이 없는 날들이었다. 가끔은 피곤해서, 가끔은 에너지가 없어서 씻고 자고 일하고, 씻고 자고 일하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약간은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애인의 생일 준비는 해야 한다. 내가 피곤한 거랑, 상대가 생일 대접을 제대로 받아야 하는 건 다르니까.
제대로 생일 준비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예 비싼 케이크를 하나 사기로 했다. 금요일, 부랴부랴 네이버로 00 호텔 딸기케이크를 예약했다. 토요일 아침에 픽업하러 가면서 얘가 호텔 케이크 먹고 싶다고 한 게 있는데, 혹시 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뜬금없는 다른 호텔 케이크를 산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 어쩌고 호텔 케이크가 맞았다. 애인은 받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고맙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했는데, 역시 돈의 맛이 좋긴 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잘 생겼냐는 말에, 앞으로 케이크 사려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생일을 적당히 보냈다.
예전에 친구와 애인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 있다. 친구는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고, 필자는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혼자 열심히 해도 가족이든 애인이든 누가 봐주지 않으면 금세 흥미를 잃는다. 가족은 필자에게 흥미가 없고, 아니 있다 쳐도 표현을 잘 안 하고, 애인은 흥미도 가져주고 표현도 잘한다. 그래서 글이니 적자면 외로운 1인 가구가 고양이를 기르는 마음처럼 애인을 만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애인은 재미있다. 위에 적었던 것처럼 필자에게 반응을 잘해주는 건 기본이고, 딸기 케이크를 받고 우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마 누군가 필자가 갖고 싶었던 포켓몬 티셔츠, 인디언액세서리, 전기면도기 등을 지금 당장 준다고 해도 필자는 "어어.. 고마워" 빼고는 할 말이 없을 거다. 그리고 전기면도기를 빼면 적당히 사용하다가 잊어버렸을 거다.
처음에는 감정적이고, 단순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순간을 즐기는 모습이 신기하긴 해도 오래가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이 광경들을 보는 게 따분한 삶의 이벤트가 되어서 지금은 고맙게 생각한다.
지금 당장 10만 원을 써도 필자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10만 원으로 케이크를 사서, 상대를 기뻐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건 기분을 나아지게 한다. 그래서 요즘은 남에게 뭔가를 사주고, 선물하는 맛으로 산다.
예전에 고시원에 살던 때랑은 또 다른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