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가족들로 일상을 채우는
군인인 친구가 있다. 전역을 고민중이란다. 군대 내에선 매일이 사건이고 위기인데 밖에선 다들 핫플이며 데이트며 전혀 상관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허망함과 무력감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자부심도 사라지나보다. 한편으론 이야기를 들으면서, 친구가 공무원으로서 약간의 여유와 변화없는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의 무관심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공기관과 스타트업, 아르바이트 등 다 해봤지만 이익과 손해가 엮여있지 않은 일은 스트레스와 일의 업무량이 다르다. 공공에서의 스트레스는 약간의 무력감과 인간관계, 위아래에서의 눈치 같은 거였다면 사조직에서는 성과가 안 나오면 어떻게든 해내야한다는 다른 압박이 있다. 정신적 운동과 육체적 운동의 차이랄까.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둘 중 어떤 게 더 힘드냐고 묻는다면 보통은 후자를 고를 거다.
가끔 집에 오면 부모님과 연예인들이 떠드는 프로를 본다. 그건 김치 이름을 따기도 했고, 세상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다들 포맷은 비슷하다. 연예인들이 무진장 많이 나와 약간은 사적이고 민감한 부분에 대해 떠든다. 가끔 보면 부모님은 자식보다 연예인에 대해 더 잘 아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다.
쟤는 나이가 몇이고, 뭘 좋아하고, 언제 이혼했고, 누구랑 사귀어서 아기가 지금 말을 하고.
손녀는 몇 달 만에 한 번 보지만, TV 속 아기들은 주에 1번씩 본다. 평생 마주칠 일도 없는 돌싱 연예인들은 매주 재방송까지 챙겨가면서 본다. 가족은 명절이나, 제사, 생일 때나 온다.
오늘은 보는데 '며느리야 방송 봤으니 알겠지?' '평소 같았으면 말 못 했겠지만' 이런 말이 나와 신기할 정도였다. 그 내용은 까고 보면 대단한 건 아니다. 듣기 민망한 사적인 내용 정도다. 며느리가 잘난 척을 했네, 그때는 서운했네 어쩌네. 옆집 아줌마가 하소연하는 그 정도의 내용들? 굳이 들을 필요는 없지만 듣다 보면 재밌고 화자가 아는 연예인이어서 더 재밌는 그 정도의 내용들?
필자는 연예인들이 돈을 버는 이유는 자식들이 받아야 할 그 관심과 부담을 대체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TV와 유튜브의 발달로 보고 즐길 게 많아져서 굳이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그 대가로 몇 억의 광고료를 받고 빌딩을 산다. 과한 대가일 수도 있겠지만, 몇백만 명이 지나가면서 내 이야기를 하는 걸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커뮤니티에서 연애결혼 이혼 출산까지 다 카메라로 찍는 연예인들이 뭐가 불쌍하냐는 글이 있었다. 기초수급자에 달동네 사는 내가 제일 불쌍한데 저렇게 불쌍한 척 하고 뒤로는 광고 찍고 빌딩 사는 애들이 뭐가 불쌍하냐는 내용이었다. 맞는 말이긴 하다. 금전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연예인들의 일상을 보다 보면, 그 보상을 알게 되면 허탈을 느낄 거다. 그런데 이것도 분명 대가가 있다. 절대 잃을 게 없는 행동이 아니다.
예쁜 얼굴 잘생긴 얼굴 그리고 입담 털어가면서 얻은, 누군가는 평생을 일해 얻어야 하는 그 금전보상은 수백만명의 시각과 뒷담으로 다가온다. 금전적으로 어려운 게 진짜 육체적으로 힘든 거라면 연예인들의 삶은 정신적으로 더 힘들겠지.
분가하고 1년에 4번 오고, 30년 정도 더 본다고 하면 부모님을 120번 정도밖에 못 본다. TV속 말 한마디 못 섞어볼 사람들에게는 온갖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고, 지 새끼보다 더 많은 걸 아는데 진짜 웃긴다. 실제로 TV를 보다가 이 상황이 웃겨서 혼자서 꽤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자식 하나 키우는 데 몇억이라는데 그 보상이 이 정도구나. 어떤 부모는 자식이 어렸을 때 보여준 모습들이 충분한 보답이 됐다지만 그것도 부모가 할 말이지 자식이 먼저 꺼낼 말은 아니지 않은가. 손님이 왕이라는 말은 가게 주인이 사용해야 멋있는 말이지 그 말을 먼저 꺼내는 손님은 진상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무튼.
그래서 최대한 자주 집에 오려고 하고 있다. 와서 일을 하기도 애매하고 대화를 많이 하지도 않지만 그냥 있는다. 그러다 보면 뭐라도 생긴다. TV나 신문을 보다가 소재를 찾기도 하고 예전 추억들을 꺼낸다. 민망하지만 애인 이야기도 꺼낸다. 부모의 대화소재나 일상이 당신들의 인생과는 일절 관련도 없는 일들로 채워가는 게 자식으로서 부끄러워서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지만, 전보다는 노력한다.
아마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가 다 되어도 흔히 말하는 살가운 자식은 못 될 거다. 형이 가출하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어머니가 미쳐 날뛰는 그날에 가족으로서 그 무언가는 많이 잃어버렸다. 개그맨 김대희 님이 했던 개콘의 "밥묵자"는 정말 우리 집이랑 똑같아서 그 코너가 나올 때가 제일 싫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 밥 먹자는 행동이 어떻게든 가족의 끈을 이어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분명 우리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늘 그랬듯 인생은 어제의 나보다만 좋아지면 되니까. 어제의 우리 가족보다만 조금 더 좋아지면 되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