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내와 결혼 300일 기념 파티를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신혼여행에서 이혼하는 부부도 있는데 그동안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30년 넘게 각자 살던 두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 보니 태어나 자란 지역도 학창 시절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연애 때를 제외하고는 같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두 사람이 만나서 마음이 맞아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결혼한 지 4년 안에 이혼하는 부부가 왜 그렇게 많은지(대한민국 기준 2023년 약 1만7000건)를 결혼을 해야만 알 수 있겠다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아내와 나는 1년 간의 짧은 연애 끝에 결혼했다. 지난 연애에 지쳐 서른 살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연애가 아닌 결혼할 상대를 찾았다. 처음 공식적으로 만나는 날 서로에게 맞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내며 도저히 맞지 않으면 헤어지자고 약속했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가 결혼 준비, 결혼식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프러포즈를 하러 다이아 목걸이를 사면서 이걸 과연 좋아할까 고민했던 기억, 상견례는 무리 없이 잘 끝낼 수 있을까 걱정했던 기억, 애인 부모님께 잘못 보이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첫인사의 추억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아내와 나는 성격에 맞는 부분이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 MBTI를 100% 믿진 않지만 F와 T의 차이에 대한 설명에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ENFJ인 나는 이것저것 신경 쓰는 것을 좋아하고 내면의 이야기를 겉으로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ENTP인 아내는 꼭 서로를 챙겨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함께 상상하며 고민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여행을 가거나 주말이 되면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낭만을 느끼고 싶은데 아내는 주중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잠자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결혼을 하고 한동안은 누가 더 참고 누가 더 변해야 하는지 토의했다. 답이 없는 문제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둘 다 관계 안에서 해결해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남규홍 PD의 책에서 의미 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그가 ‘나는 솔로’를 연출하며 적은 자막을 모은 책이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구절은 정확하진 않지만 ‘너를 너무 사랑해 자꾸 너에게서 나를 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욕심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지내자고 했지만 계속 상대에게서 나의 모습을 찾는다. 결국 다툼은 나는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있고 당신이 변하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싸우지 않는다. 그렇게 싸우는 것은 답이 없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정말 신기하게도 싸움을 멈추니까 서로가 변했다. 휴일이면 늘 지방으로 여행을 다니던 내가 아내와 함께 집에서 낮잠을 자고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다. 막상 해보니 그것도 나름 낭만적이다. 평생 디저트라곤 먹어본 적 없던 내가 여행을 가면 아내를 위해 어떤 디저트를 사갈지 고민한다. 아내도 달라졌다. 의례적으로 하던 운동에 마음을 담아서 하고 결혼 300일 같은 아무것도 아닌 날에도 선뜻 외식하러 나와준다.
변화는 포기의 다른 말이다. 내가 변하면서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 것처럼 모르긴 몰라도 아내도 이야기를 안 해서 그렇지 많은 부분을 포기했을 것이다. 달라진 내 모습에 아쉬움은 없다. 아내에게서 내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 것처럼 아내도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찾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다름을 인정하고 나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거나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사랑의 걸림돌은 내 방식이 맞다는 머리 큰 성인의 이기심이었다.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지만 지금 달라진 내 모습이 위대한 사랑의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결혼 300일을 맞은 우리는 앞으로도 열심히 부대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 과정이 괴로워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고 회피하며 살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고 싸우진 않을 것이다. 앞으로 결혼 600일, 900일 맞이했을 때 나와 아내의 모습은 지금보다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떤 모습이더라도 함께 서로를 가꾸며 용기를 주고받자.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