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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도연 Aug 29. 2022

'놉' - 포식자를 거부하는 외침

'진짜 카우보이'의 원형을 복원하는 여정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 '놉(Nope)'은 보이지 않는 권력이 무분별한 탐욕으로 몰락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영화를 지배하는 UFO는 말 그대로 '미확인' 비행물체. 인간들 머리 위를 맴도는 감시자이자, 구름 속 천사처럼 실체는 노출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힘이다.


[진 재킷, 인간을 사육하는 미확인 카우보이]

영화 속 UFO 이미지는 후반 형태를 바꾸기 전까지 카우보이 모자 챙의 모습이다. 이는 카우보이로 대변되는 백인 중심 서부개척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에메랄드(케케 파머)가 UFO를 지칭한 이름 '진 재킷'도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더한다.


눈동자의 형태도 보인다. 숱하게 등장하는 카메라들은 인간의 눈을 모방한 파생 이미지이고, 시선은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진 재킷의 텅 빈 동공은 미국을 지배하는 거대 카우보이의 실체와 욕망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영화 '놉'의 가장 근원적 갈등과 상징은 하얀 카우보이 모자를 꾹 눌러쓴 리키(스티븐 연)의 모습에 담긴다. 백인 주도 시스템에 착취당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도 카우보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유색인종, 실패가 예견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다.


침팬지 고디가 쇼의 모든 백인을 살해하고도 리키를 내버려둔 건 포식자의 노리개로서 침팬지와 유색인종이 등가라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리키는 여전히 시스템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선택 받은 예외적 존재로 여긴다.




['1984' 또는 '멋진 신세계'의 울타리]

카우보이 진 재킷의 욕망은 '통제'다. 휘하의 인간들이 고개를 처박고 그저 소처럼 땅의 풀만 뜯기를 바란다. 그래야 시스템을 살찌울 수 있으니까. 만약 고개를 쳐들고 시스템을 빤히 들여다보는 반동분자가 보이면 가차없이 삼킨다.


자유를 강탈하는 측면에선 조지 오웰 '1984', 진실을 외면한다면 뭐든 취해도 좋도록 방임하는 측면에선 올더스 헉슬리 '진 신세계'가 떠오른다. 어느 쪽이든 피사육자를 유무형의 울타리에 가두고, 하늘의 권력을 넘볼 수 없게 한다.


첫 죽음은 부친(키스 데이비드)이 진 재킷을 확인하려다 안구가 뚫리며 시작된다. 구약 성경에선 천사를 직접 본 인간은 눈이 타거나 죽는다. 모든 권력의 국룰일까. 절대 심연을 들여다봐선 안 된다. 모른 척 눈 감고 시스템의 부속으로 머물러야 목숨을 연명한다.




[스스로를 삼킨, 욕망의 종착역]

신도 실패한 통제를 시스템이라고 성공할까. 제멋대로니까 인간이다. 부친의 죽음까진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한 재해로 여겼지만, 서서히 실체를 깨닫고 목숨까지 거는 도전자들이 나타난다. 물론 도전이 늘 아름다운 건 아니다.


카우보이를 꿈꾸는 리키는 고디의 시청자처럼 진 재킷을 관람하는 것으로 생의 주도권을 확인하려 든다. 진 재킷은 이 시선이 괘씸하다. 말을 제물로 바치던 한낱 마름 따위가 주인 자리를 넘보려 들어? 눈 안 깔어? 진 재킷은 리키의 카우보이 모자를 벗기고 그와 그의 관객들을 삼킨다.


TMZ 기자와 헐리웃 촬영감독(마이클 윈콧)은 가장 먼저 UFO를 앵글에 담겠단 욕망을 불나방처럼 태운다. TMZ 기자의 욕망은 숫제 거대한 눈알 모양의 헬멧, 인간성 없는 외계인의 모습을 띤다. 인간을 초월한 디지털 미디어 세계의 권력을 꿈꿨지만, 실체 없는 세계는 소멸도 한 순간이었다.


촬영감독은 장엄하게 포식자와 맞선다. 마치 '노인과 바다'처럼. 하지만 실은 그 역시 포식자의 스너프 필름으로 대리 만족하던 또 한 명의 '카우보이 지망생'이었을 뿐이다. 그의 확신에 찬 몰빵은 기껏 어렵게 모은 판돈이자 증거, 필름들마저 날려버린다. 멈추지 않는 욕망은 더 큰 욕망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모든 증거를 인멸한, 강력한 힘의 완전범죄. 진 재킷.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걸 통제하려던 그 역시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다.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겠다며 시작된 폭주는 멈추지 않고 무지성으로 뭐든 닥치는 대로 처먹기 시작한다. 카우보이의 자태는 사라지고 야만적인 실체가 드러난다.


진 재킷은 더 이상 자신의 주인도 아니다. 사육하던 인간처럼, 아니, 잔인한 살해 현장의 피칠갑 고디처럼, 아니, 이젠 숫제 심해의 해파리처럼 부유하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야만성 그 자체가 된다. 그래 어쩌면, 진 재킷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걸.


이성을 잃은 진 재킷은 바로 코 앞의 실체도 분별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주피터 파크의 대형 카우보이 인형 앞에서 진 재킷의 동공은 사라지고 카메라만 남는다. 세계의 진실은 앵글을 거치며 퇴색되는 걸까. 마침내 진 재킷은 인형을 삼키고, 인형의 가스와 함께 폭발하며 피사육자의 땅으로 추락한다.



['진짜 카우보이'의 원형을 복원하는 OJ]

주인공 OJ(다니엘 칼루야)는 왜곡된 카우보이의 실체를 폭로하고 본연의 형태를 재건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달리는 말' 영상의 흑인 이미지는 이를 예고하는 단초가 된다. 이 흑인이 OJ의 조상이란 점은 영화 산업 지분을 일컫기도 하지만, '진짜 카우보이'의 유래를 알리는 시작이기도 하다.


카우보이가 뭔가? 목동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흑인이었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서부 텍사스 대평원, 서부 개척자들은 소를 방목하면서 궂은 목장 일을 맡길 인부가 필요했다. 당시 서부에서 소 한 마리는 3달러 수준. 그만큼 공급 과잉이었고, 그 많은 소들을 관리하는 건 고된 노역이었을 거다.


뿌리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애초 소떼몰이는 에스파냐의 전공. 1820년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소를 키우는 '가우초'들이 대거 북상한다. 당시 미국 남서부는 멕시코 영토였다. 가우초는 에스파냐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혼혈이 대부분이었고, 카우보이보다 챙이 넓은 모자와 판초를 입었다. 가우초가 미국식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 카우보이다.


카우보이는 약탈자도 아니었다. 소 공급이 부족한 동부에서 소 값이 치솟자 서부 카우보이들은 주인들의 소떼를 몰고 대륙을 가르는 대장정의 임무를 맡게 되는데, 약탈을 방어하고 소를 보호하는 긴 여정 속에서 카우보이는 거칠고, 더럽고,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우보이는 수호자였다.



그러나 진 재킷이 투영하는 카우보이는 수호자가 아닌 약탈자의 모습이다. 유색인종 가우초와 흑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훔치고, 황야에서 총질하는 미국 백인 무법자 이미지를 만들었다. 시스템이 사육하는 인간은 언제든 먹고 버릴 수 있는 일회용품으로 취급한다.


반면, OJ는 수호자로서의 카우보이 이미지를 재건한다. 경제 사정으로 부득이 팔았던 말을 되찾기 위해 고심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말들의 밥을 주러 다시 목장으로 돌아간다. 제물이 된 럭키를 살리러 폭풍 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허드슨강 기적' 설리 기장이 떠오르는 '리더'의 모습이다.


인격적 존중과 대화도 눈에 띈다. 자기애 강한 에메랄드, 추억에 취한 리키는 귀를 막고 살지만, OJ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을 건다. 고스트가 목장 밖으로 뛰쳐나갈 때에도,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며 녀석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영화의 대단원. OJ는 신약 성경의 예수처럼 제물을 자처한다. 이건 과한 이상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시스템의 주인은 그만큼의 희생과 변화가 필요하단 메시지로도 읽힌다. 구약의 율법이 신약의 은총으로 바뀌듯 통제와 권위의 시스템은 대전환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분별한 포식과 벌크업을 멈추고, 일방향의 감시와 통제를 그치고, 프레임에 갇힌 카메라가 아닌, 직접 서로의 눈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기 위해서. 카우보이 본연의 형상을 회복하고, 세계의 약탈자가 아닌, 수호자의 모습으로. 누군가의 머리 위가 아닌, 함께 같은 대지에 발을 딛고서. 총알 대신, 더 이상 포식을 거부하는 '놉' 한 방을 날리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그게 아니어도 좋은, 보물창고]

물론 피곤하게 보지 않아도 영화 '놉'은 충분히 즐겁다. 미지의 존재와 대치하는 과정의 숨막히는 서스펜스와 몰입감,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거칠게 울리는 야생의 숨소리, 바이크와 말이 공존하는 박력 넘치는 서부극 액션, 수십 가지 다양한 이미지들이 교차하는 초자연의 추상들, 뭐든 좋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관객들은 부러 이 영화를 이쪽저쪽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며 피로를 자처하는 것 같다. 그게 '놉'이다. 한 편에 쉴 틈 없는 상징과 오마주, 서브텍스트를 마구 구겨 넣어서, 마치 일주일간 영화제에서 이리 저리 탈탈 털리고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영화. 보물창고다.


고맙습니다. 조던 필. 이번이 첫 관람인데,

제가 아는 조씨 감독 중 최고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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