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날씨, 소란한 고민. 일은 슬럼프였다. 벌써? 응, 벌써. 와중에 우영우를 만났다. 우연이었다. 새벽 귀가해 게으른 늦잠을 잔 날. 그날따라 루틴인 영등포 순대국 대신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려 든 오후. TV에서 우영우 1화가 흘렀다. 이상한 드라마네, 그래도 박은빈이니까, 하며 꾸역꾸역 밥을 삼켰다. 몰랐다. 유독 뜨거웠던 여름, 그렇게 든든한 동행이 시작될 줄은.
[에누리 없이 직진한 우영우]
빠져들었다. 촘촘한 구성, 빵빵한 유머. 서사와 연출이 초 단위로 빽빽하게 들어차 허투루 쓰이는 컷이 없었다. 오랜만이다. '총알탄 사나이'를 보던 꼬마처럼 미친듯이 킬킬댄 것도, 잘 마른 화선지에 떨어진 먹처럼 가슴에 퍼지는 먹먹한 감정도. 다만 에피소드 중심의 법정물 전개 특성상 캐릭터 빌드업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마저 몰랐다. 그토록 섣부른 걱정일 줄은.
문지원 작가는 에누리가 없었다. 에피소드로 퉁치거나, 시리즈 후반쯤 감상 격으로나 다룰 줄 알았던 자폐라는 조건을 대번에 3화 타이틀로 걸었다. '미안해. 복잡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며 슬금슬금 내빼는 남편 머리채를 잡아끌며 '뭐가 미안한데?!'라고 소리치는 아내처럼 단도직입적이다. 심지어 악조건의 우영우를 '연애'란 주제와 씨름시키질 않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영구 미제의 가혹한 숙제에도 떠민다.
고 정주영 회장의 '해봤어?'가 떠오른다. 어렵고 자시고 일단은 해봐야 되는 게 우영우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3화에서 짚었듯 그의 장애 조건은 일반적이지 않다. 오히려 우영우는 '드래곤볼'이나 '나루토'처럼 결계를 부수며 성장하는 무협 판타지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호흡이라면 다음 시즌에선 투병 후 현타 온 정명석과 함께 한바다를 나가 '미생'처럼 회사를 세우거나, 엄마도 실패한 법무부장관에 도전할 수도 있겠단 상상마저 들었다.
[문제는 자폐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 조건]
슬럼프 당시 고민은 그런 것이었다. 혼자서만 작업하는 고립감, 작품 성패에 대한 불안함, 부친의 폐암과 자잘한 사건들, 멀어지는 돈과 관계들. 술이 늘고, 의욕이 꺾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기 시작했다. 이건 그저 우연히 마주친 오늘만의 불행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일용직 웹툰 노동자로서, 앞으로도 계속 피할 수 없는 생존 조건이란 걸.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자신만의 생존 조건에게 계속 뺨을 처맞고 살고 있다는 걸.
새삼 우영우가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장애이건,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의 판타지이건, 어쨌든 모든 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생존 조건에 제약된다. 정명석, 최수연, 권민우, 태수미, 한선영도 그럴 것이다. 숱한 원고와 피고도 저마다의 조건과 싸우며 성장의 여정 어딘가를 통과하는 중이었을 거다. 실제 '장애'라 부를 수는 없어도, 저마다 '장애'라고 느끼면서.
[잠시만 우영우를 좀 내버려둬]
어느 날 타임스퀘어로 들어서는데, 자폐인으로 보이는 일행이 무거운 걸음으로 회전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풍경이지만, 우영우가 보였다. 회전문이 멈춘 주말이라 다행이지, 평일이라면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이게 우영우가 내게 한 일이다. 장애의 측면에서도, 장애가 확장된 모든 차별과 심적 물적 결계 측면에서도. 한 번쯤 더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 그건 꽤 큰 기여일 거다. 우영우는 애썼다.
그런데 숙제만 느는 것 같다. 다음 시즌에는 실제 자폐인 연기자도 출연시켜야 된다는 요구도 본다. 우영우의 문제 제기가 의미 있었다면, 그 저변 확대는 업계 전반이 함께 움직여야 바람직한 흐름 아닐까. 우영우에게만 숙제를 주는 건, 조별 과제에서 주제 제안한 사람에게 조장과 발표까지 떠넘기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이러니까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가는' 루즈한 문화만 남는다.
비판과 요구 다 좋지만, 쉽지 않은 길을 꽤 나쁘지 않게 완주한 이가 있다면 그저 잠시 말없이 등을 토닥여 주는 것도 괜찮겠다.
['멜로가 체질'도 뿌듯해 할 거야. 마침내]
첫 주 우영우의 시청률은 1%였다. 아아, '멜로가 체질'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어째서, 어째서를 외쳤다. 넷플릭스에선 한국판 '종이의 집'이 1위를 달렸다. 어째서, 어째서를 외쳤다. 그러나 우영우는 여전히 에누리 없이 직진했다. 시청률은 매주 기록을 갈아치우더니 결국 17.5%, 넷플릭스 1위도 집어삼켰다. 재앙 같던 한국판 '종이의 집'은 사라졌다.
그거슨 과연 마지막 화 대사의 느낌. 뿌듯함. 우영우와 이준호가 서로 마주보며 미소 짓던 장면은 흡사 MG새마을금고 적금 만기를 달성한 신혼부부의 광고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우영우와 함께 슬럼프와 싸운 이 여름은 실제 적금처럼, 매일 현실의 생존 조건을 인정하면서, 행운보다 위대한 행복을 차곡차곡 쌓는 걸 배우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