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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Dec 01. 2022

세 번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삼세번을 좋아한다.

삼신할머니의 점지로 아이가 태어나고,

미운 세 살은 자기 고집으로 생떼를 부리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보내며 자아정체성을 맞이한다.

내기를 해도 '삼세판!'을 외치기도 한다.

그렇게 '세 번'은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포함해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관대한 문화다.

이해라는 관점에서 용서를, 관용을 베풀기도 한다.

술 먹고 주정을 부려도

'그럴 수 있어.'

도발적인 행동을 해도

'무슨 일 있나? 왜 그러지?'

라며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예전 회사 다닐 때, 신입사원이 들어와 우리 부서 일을 알려 줄 때 일이었다.  

처음 입사한 후배는 일에 대해 두려움 없이 잘해 냈고, 차근차근히 하면 된다며 조금씩 일을 늘려갔다.

헌데,

후배는 일을 끝마쳐야 하는데, 마무리를 하지 않고 퇴근했다.

다음날 바로 시행해야 하는 팀은 그 마무리 때문에 일이 늦어졌고, 전체적으로 혼이 났다.


우리 팀은 처음이라 그 후배에게 당황해서,

깜박해서, 잘 몰라서 그럴 수 있다며 그 후배의 실수를 덮었다.

미안해하며,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후배에게 잘못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후배는 비슷한 일을 실수했고,

팀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누구는 '일이 어렵나?'


우린 그 후배가 일을 하면 다시 한번 검사를 했고, 당부를 했다.

세 번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몇 주 뒤,

또 울먹거리며 '죄송합니다.'를 연신 말하는 후배를

그 누구도

'괜찮아.'

'실수했군...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후배의 실수를 '같은 팀'이라는 말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는 '그럴 수 있어.'

두 번의 실수는 '그럴 수 있어.'

세 번의 실수는 '그럴 수 없어.'였다.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한다는 건 실수가 아닌,

버릇이거나, 성격이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용서라는 말도 세 번은 할 수 없다.

'용서'에서

'의아'하고

'외면...' 하게 된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

기계적으로 메모리가 되어 있지 않기에, 충분히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실수하는 사람을 우리는 용서를 해준다.


실수를 한 사람은 내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 또한 인간이기에 같은 부분에서 놓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노트에 메모해 놓거나 핸드폰에 기억해 둬야 같은 실수를 번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 번째의 실수는 실수가 아닌 것이 된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길가에 쓰러져도, 욕을 해도, 울어도

이해라는 말로 그러려니 하지만,

매번 그 사람과 술을 마실 때마다 쓰러지고, 욕하고, 울고 불고 하면 같이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폭력에 무릎 꿇고 빌며 용서해달라는 애원에

'그런 사람이 아닌데 화가 났다 보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샌드백이 되어 있다.

사람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는 건 단 한 번이라도 실수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로 덮어버리면 안 된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서와 관용에 대해 관대하다.


아무렇지 않게 잘못한 일을 덮어버린다.

하지만, 그 일이 덮어진다고 덮어지는 게 아니다. 저 한편에 묻어두는 것뿐이다.



그 사람과 다시 관계를 이어야 하기에...



인물이 좋은 사람과,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입사를 했다.

인물 좋은 사람에게 사람의 호감과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의 행동에 집중하고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인물이 좋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 뒷전이다.

인물도 좋은데 일도 잘하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사람들의 도움과 이해로 일에 대해 나태해지고 자꾸만 실수를 한다.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거기까지가 된다.

'인물만 좋으면 뭐해.'


인물이 좋지 않은 이는 배우려 열심히 하고 물어보며 자신 스스로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에 사람들은 서서히 도와주려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가진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에게 누가 무관심으로 일관하겠나.


세 번의 실수가 나온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의 행동으로 민폐가 되는 것은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기 때문이다.


관용(寬容)-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용서(容恕)-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줌.


상대는 나에게 관용과, 용서를 하기 위해서

참고,

참고,

참고하는 것이다.




딱 세 번의 忍(참을 인).

칼을 마음에 품고 있는 형국이다.

용서는 어떻게 보면 이해 같지만,

칼을 숨겨 놓고 당신이 실수하기만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과 달리 용서라는 말로 상대를 용서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벽과 얘기하는 것 같도 답답하고, 나 혼자 떠드는 느낌이 들 때 그냥 용서를 하기도 합니다.

용서를 하며 그 사람을 잡고 싶기도 하지만,

용서를 하며 그 사람을 서서히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용서...

두 가지의 얼굴 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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