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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봉선 Jul 08. 2020

흙 묻은 신발

주말농장에 갔다 오신 아빠의 흙 묻은 신발... 죄책감


“아빠 제발 그냥 가만히 좀 계세요!”


언성을 높이며 30분째 얘길하고 있었다. 혼자서 목청을 높이다 보니 목이 걸걸거리며 아플정도, 맞은편에 앉은 아빠는 연신 담배만 피워대시고 그 모습에 나도 지친다. 이제는 좀 이해를 하셨겠지…

“갈게요.”

인사를 하고 나와도 대답은 없다. 


뇌졸중으로 두 번이나 쓰러지시고 병원에서 시술까지 하신 아빠는 부지런한 운동과 재활로 일상생활은 편해지셨지만, 힘든 일을 하시면 안된다. 

심근경색도 있으셔서 더욱이 그렇다. 그런데 아직은 할수있다 생각하시는지 아는 분들의 부추김에 예전 하던 일을 자꾸 잡으셔서 오신다.

작은 일인데도 많이 힘들어하시고 손과 다리에 기운이 없어 실수가 잦아, 돈을 벌어오는게 아니라 오히려 물어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하시란 말을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아빠 걱정에 주말농장이나, 산책 위주로 다니시라고 좋게 얘길 했지만 대답만 하시곤 다시 일을 만드시는 통에 아빠를 보면 울화가 치미듯이 화가났다. 

엄마는 “네가 얘기해라. 난 속이 터져서 못하겠다.”하시고 오빠와 언니는 손을 놓고 있으니 그 악역의 자리는 내것이었다. 

“딸인데 너무한거 아냐?” 남편의 소리에도 어쩔수 없다.


아빠는 엄마랑 55년을 살면서 하고싶은 일은 다해보고 사신분이다.

낚시, 등산, 여행을 다니시며 집은 나 몰라라 하셨으니 힘들어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회피하신 아빠에 대한 연민도 없었다. 


집에서 막내라 그런지 부모님과 제일 오래 생활을 하게 되고, 결혼해서도 일을 만드시는 아빠 때문에 멀리 이사 가지도 못하고 지척에서 생활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출동하기일수.

그러니 자연히 아빠와의 사이는 멀어질뿐 아니라 미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네에서 어쩌다 봐도 아빠는 나를 외면하고, 나도 “아빠 어디 가세요?”라고 불편한 안부를 묻곤했다.

그러나 해외에 거주하는 언니가 오면 반가워하고 좋아하셨다. 언니는 아빠에게 다정하고 정감있게 얘길 한다. “아빠 몸이 아프시니 쉬엄쉬엄 다니세요.” 말하면

“그래 고맙다. 너도 건강해야지? 아픈데는 없니?” 어쩜 그리도 절절한지…

언니는 아빠의 작아진 몸집을 보고 마음 아프다고 울기도 한다. “그렇게 정정하던 분의 어깨가 왜저리 작아지셨니... 너도 아빠한테 심하게 하지 말고” 언니의 그 말에 답을 할수 없었다.

나처럼 일처리 하며 다닌다면 무슨말이 나올까? 서운하기도 했다. 


6월.

때 이른 더위가 찾아왔다. 

시장을 다녀오며 맞은편에 걸어오시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빠는 주말농장을 다녀오신듯 작업복에 흙묻은 신발을 신고 계셨다. 그 모습이 왜그리 짠한지...

지갑을 열어 있는 지폐를 다꺼내 아빠바지 주머니에 넣어드렸다. 

“아빠 날도 더운데  농장 갔다오셨어요? 옷 갈아입으시고 시원하게 냉면 한그릇 사드세요. 친구분들도 부르시고요.” 

가만히 서 있던 아빠는 한마디 하셨다. “고맙다” 하시고 다시 걸음을 옮기시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괜스레 눈물이 났다. 


그리고 며칠 뒤... 아빠는 돌아가셨다. 

심근경색 시술때 3~4년정도 생각하란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4년을 더 사시고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죽음, 아빠의 부재, 자식의 마음…

장례식을 끝내고 집으로와 문을 잠그고 얼마나 울었는지...

죄책감이 나를 혼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모질게 했니!  좀 더 잘해드리지”  

마지막으로 봤던, 흙묻은 신발을 신고 말없이 돌아서던 아빠 생각에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울었다. 

아빠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왔고, 길을 가다가도 눈물이 나고,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시도때도 없이 눈물은 내맘과 달리 흘러나왔다.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  다시는 볼수없게 되버린 아빠를 생각하니 모질게 대했던 내 행동에 대한 죄책감... 통회... 모든것이 내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럴 때마다 기도했다. 죄송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6년이 흐르고,

시간의 치유력은 높아 아빠에 대한 아픈 기억은 서서히 잊고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기약없는 이별의 아픔을 겪고 난뒤 홀로 남으신 엄마가 걱정이었다. 

많은 고생으로 안아픈곳이 없을 정도로 밥보다 약드시는게 더많고, 걸어 다니시는것보다 누워계실때가 더많은 나이가 되셨다. 

하지만 편히 쉬는게 익숙하지 않으신 엄마는 모든 일을 아직도 본인이 다하려고 하신다. 

‘자식에게 기대어 사는게 사는거냐’

엄마는 강철처럼 보이시고 싶으셨나보다. 

하지만 두다리 수술까지 하신분이 무릎에 힘을주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

'하지마시라. 하지마시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갔고, 그래도 굳이 본인이 하겠다며 움직이는 모습에 점점 아빠에게 했던 짜증스런 말과행동을 엄마에게 하려는걸 알았다. 

나 자신에게 충격이었다.

나는 못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딸이 옆에서 잘하네. 친정엄마는 좋겠다.”

이런 소리에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엄마 힘들어하지 않게, 엄마가 힘쓰지 않게,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그런게  내할일이고,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물가에 내놓은 아기를 보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엄마를...그렇게 대했나 보다. 


며칠 전 엄마의 정기검사로 병원을 방문했을때,

“내가 너랑오면 이렇게 애기가 된다.”라고 엄마가 웃으며 얘기하셨다. 

후회로 남지 않을 만큼 엄마를 많이 사랑하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그저 나편하자고 하는 행동에 불과할 수 있다는 알았다.

가족이라는 핑계로 걸러내지 않은 말들로 상처받았을 아빠의아픔...

그런것이 다시 엄마에게 되풀이될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아빠를 이해시키려고만 했지, 아빠를 이해하려고 하지않았고 

내 목소리만냈지,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않았다.

한평생 몸을 움직이며 먹고 살아온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으니 그저 일만들지 말고있어라.’ 그런 의미로 들렸을테니...


6월 아빠의 제사가 다가온다. 

“엄마 힘드니까 이번 제사는 내가 차릴게 엄마는 그냥 보고계셔요.” 하다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렸다.

“아니, 아빠는 엄마 음식외에 잘 않드셨으니 아빠가 좋아하는 생선요리는 엄마가 하시고 나머지는 내가 할게.” 그말에 엄마는 웃으신다. 

이번 아빠 제사상에 무릎 꿇고 앉아 한마디 해야겠다. 

“죄송했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한번도 해보지 못한 말, 용기 내서 해야겠다. 


아빠를 잃고서 고통으로 후회했던 시간... 그 시간에 대한 성찰을 하며  앞으로 남겨진 엄마와의 시간을 소중히 보내고 싶다. 



"엄마 사랑합니다. 좀 더 우리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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