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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23. 2020

기거(寄居)와 유람(遊覽)

농암 김창협 선생의 경우

일러스트 김억중


농암 선생의 연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21세에 송경의 천마산으로부터 시작되는 명승유람과 29세에 응암에 터를 잡고 집을 지으신 이래 몇 차례 이어지는 집짓기와 기거 이력은 물론 잠시나마 외유중 독서하고 담론을 즐겼던 한거(閑居) 경력까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있다. 물론 대다수 선비들의 연보에서 빠지지 않고 기록된 내용 중에는 화려한 관직 이력이 아무래도 첫 째로 꼽히는 것이 상례다. 하지만 농암 선생의 경우가 매우 이례적인 것은 자신의 기거와 외유 경력이 학벌과 명예와 관련된 스팩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농암(農巖), (金昌協, 1651~1708)

그렇게 9세 외할아버지를 따라 해주 임소로 향했던 첫 외유에서부터 58세 배를 타고 물고기 구경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몽와공을 모시고 묘적사에 다녀오신 후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곳으로 가시기까지, 선생의 연보를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결국 선생을 조선의 커다란 선비로 키웠던 8할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평생 동안 승경을 향해 움직이거나 집안에 기거하며 멈추면서, 우주로 향했던 외향적 시선과 자신의 내면으로 투영했던 내향적 시선을 교차하고 반복했던 유람과 기거, 그 길항의 가역반응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러니 너희도 기꺼이 유람하고 기거할만하지 않겠느냐는 듯 선생의 연보는 평생의 화학반응 실험리포트처럼 이렇게 쓰여 있다.  


기해년(1659) 선생 9세

○ 외할아버지 나공(羅公 나성두(羅星斗))을 따라 해주(海州)의 임소(任所)에 갔다. 

신해년(1671) 선생 21세

○ 송경(松京)의 천마산(天磨山) 등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 8월에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하여 삼일포(三日浦), 총석(叢石) 등 여러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갑인년(1674) 선생 24세

○ 6월에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송 선생(宋先生)을 모시고 용문산(龍門山)에서 회합하였다. 

을묘년(1675) 숙종대왕(肅宗大王) 원년 ○ 선생 25세

○ 윤5월에 풍덕(豐德)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가서 박연(朴淵), 화담(花潭)을 유람하고는 돌아왔다. 

○ 8월에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였다.

병진년(1676) 선생 26세

○ 5월에 소석문(小石門)을 유람하였다.

○ 12월에 의정공을 모시고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였다.

정사년(1677) 선생 27세

○ 10월에 의정공을 모시고 도갑사(道岬寺)를 유람하였다.

○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창평(昌平)의 물염정(勿染亭)에 들러 구경하였다.

무오년(1678) 선생 28세

○ 2월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독서하였다.

기미년(1679) 선생 29세

○ 8월에 영평(永平) 응암(鷹巖)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 10월에 삼부폭포(三釜瀑布)를 구경하였다.

○ 11월에 온 가족을 데리고 응암으로 들어갔다.

○ 보문암(普門庵)을 유람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 선생 30세

○ 2월에 은구암(隱求庵)에 대해 기(記)를 지었다.

○ 여름에 응암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을축년(1685) 선생 35세

○ 5월에 부임하는 길에 풍악산(楓嶽山), 학포(鶴浦)에 들러 유람하고 6월에 경성(鏡城)에 도착하였다.

무진년(1688) 선생 38세

○ 1월에 월악산(月嶽山)을 유람하였다.

○ 3월에 단양(丹陽)의 여러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 화양동(華陽洞)에 가서 우재 선생을 뵈었다. 여가에는 선생을 모시고 파곡(葩谷), 병천(屛川), 내선유동(內仙遊洞), 외선유동(外仙遊洞)을 유람하였다. 

기사년(1689) 선생 39세

○ 9월에 응암(鷹巖)에 들어가 오두막에 거처하였다.

임신년(1692) 선생 42세

○ 2월에 농암서실(農巖書室)이 완성되었다.

계유년(1693) 선생 43세

○ 11월에 백운산(白雲山)의 절에서 독서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20) 선생 44세

○ 1월에 봉인사(奉印寺)에 머물렀다.

○ 가족을 데리고 도성을 나가 양주(楊州) 금촌(金村)에 우거하였다.

○ 농암(農巖)에 들어가 청령뢰(淸泠瀨) 가에 정자를 지었다.

을해년(1695) 선생 45세

○ 3월에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 9월에 농암에 들어갔다.

○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머물렀다.

병자년(1696) 선생 46세

○ 농암에 들어가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4월에 미음(渼陰)으로 돌아왔다.

○ 8월에 농암에 들어갔다가 원주(原州)로 향하여 청평(淸平)과 한계산(寒溪山)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정축년(1697) 선생 47세

○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 3월에 미음(渼陰)으로 돌아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윤달에 제생(諸生)과 함께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 8월에 삼주(三洲)에 거처를 정하였다.

무인년(1698) 선생 48세

○ 10월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기묘년(1699) 선생 49세

○ 송도(松都)의 천마산(天磨山)을 유람하고 다시 강화로 돌아갔다.

○ 4월에 몽와공을 모시고 보문암(普門庵)을 유람하였다.

○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경진년(1700) 선생 50세

○ 1월에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3월에 농암에 들어갔다.

10여 일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백로주(白鷺洲), 금수정(金水亭), 창옥병(蒼玉屛) 등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신사년(1701) 선생 51세

○ 1월에 석관촌(石串村)에 우거하였다.

임오년(1702) 선생 52세

○ 8월에 만취대(晩翠臺)를 유람하였다.

을유년(1705) 선생 55세

○ 8월에 상복을 벗고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정해년(1707) 선생 57세

○ 7월에 녹천(鹿川)으로 옮겨 가 우거하였다.

○ 9월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 옥류동(玉流洞)을 유람하였다.

○ 10월에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묘적사(妙寂寺)를 유람하였다.

무자년(1708) 선생 58세

○ 윤3월에 몽와공(夢窩公)을 모시고 앞 강에서 배를 타고서 물고기를 구경하였다. 

○ 몽와공을 모시고 묘적사를 유람하였다.

○ 4월 11일에 삼주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다.


어쩌면 선생에게 생애 최초로 송경 명승유람을 시작했던 21세는 대자연, 그 살아 있는 경전을 대면했다는 점에서 선비로서의 삶에 일대 기념비적인 한 해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로부터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배우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지를 단박에 깨달았을 것인즉, 세상만물의 이치와 신비를 고스란히 내장한 산수를 유람하는 즐거움과 선비의 심상을 투영한 소우주 같은 집에 유숙하며 주거의 기쁨을 맛보았을 터이니 어찌 그 수고로움을 마다할 수 있었을까.


비록 누추하나마 집 안팎을 넘나들며 만나는 온갖 경물(景物)치고 자신이 벼렸던 화두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이며 그보다 더 소중한 스승이 또 어디 있었겠는가. 그렇게 집안에서는 바깥 유람을 꿈꾸었고 집 바깥에서는 떠나온 집을 그리워했으니 마음속으로 세상천지 집 아닌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람 중이든 외지에 기거하든 선비들에게 늘 마음 쓰이는 곳은 아무래도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이었을 것이다. 농암 선생께서 간밤의 꿈이 하도 어수선하여 아침에 일어나 쓰신 시 한편을 읽어보면 일상의 슬픔과 기쁨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얼마나 크셨을지 가슴이 저며 온다.


여행길 마음이라 구름 낀 듯 어둡더니 / 客中心緖似雲多

꿈속에서 갈팡질팡 울다가 노래했네 / 夢裏紛紛哭且歌

슬픔이랑 즐거움 함께할 수 없거니 / 哀樂極知難並立

고향 집 소식이 궁금하기 그지없네 / 故園消息定如何

[농암집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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