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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24. 2020

그 자리, 그런 집 (1)

건축, 그 지고(至高)의 경지


주변머리가 없는 터라 여간해서 주례를 서지 않는 편이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PD 한 분의 결혼식 주례를 선 적이 있다. 그 녀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타고난 감수성도 대단한데다 제대로 된 TV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어찌나 치열하게 묻고 공부를 하는지 내심 감동을 받은 터였다. 그런 분이 내게 주례 부탁을 하니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평소 매뉴얼처럼 잘 준비된 주례사가 없어서 이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하던 끝에 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구름과 산이 모두가 희니     雲與山俱白
그 모습을 구별할 수 없네    雲山不辨容
구름은 가고 산 홀로 서니    雲歸山獨立
아! 일만이천봉이라          一萬二千峰


시를 읽어내려 가다보면 구름이 걷힌 금강산이 눈앞에 장관으로 펼쳐진다.  
금강산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의 빼어난 형상, 웅장한 스케일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제아무리 빼어난 용모를 지닌 금강산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박제된 풍경이라면 아름다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진부하고 지루한 풍경이겠는가. 오히려 천태만상의 구름 형상에 가려졌다 일순간 드러난 금강산 모습이야말로 시시각각 변모를 거듭하는 극적인 장면이 아닌가. 이를 정확하게 포착하여 잠깐 사이 벌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커다란 감동을 이끌어낸 시인의 미적 감수성과 기교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금강산 전경


그러고 보면 산과 구름은 그 자체의 형상만으로 감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배경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빛나는 법이 아닌가 싶다. 고정된 것(산)과 변화하는 것(구름)사이의 끊임없는 교류와 조합이 미적 감흥의 원인인 셈이니 말이다. 경쟁하듯 둘 다 동시에 멈추어 있거나 둘 다 함께 움직여도, 대상/배경 사이에서 생성되는 그 어떠한 감동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보면, 신혼부부가 서로 어떠해야 하는지도 선명해진다. 남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때면 부인이 그 은은한 배경이 되어주고, 부인이 주인공으로 주목 받아야 할 때는 남편은 커다란 나무처럼 그 배경이 되어주려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가끔씩은 내가 봐도 꽤 괜찮은 주례사를 떠올리며, 나는 요즘도 이들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있다.  


풍경, 사람의 생애가 그러 하듯 내가 보기엔 건축도 그 미학의 원리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건축물 하나만을 똑 떼어 놓고 생각한다는 것은 미학의 근간에서 멀어지는 태도다. 오히려 건축물이 배경, 또는 맥락(context) 속에 어떻게 상생하며 존재해야 하는가가 관건이다. 건축물이 저마다 뽐내는 방식으로 이웃한다면 그 어느 것도 조화로울 수 없다. 뽐내야 할 자리에 있는 건물은 그 형상이 잘 드러나도록 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실컷 뽐낼 줄 알면서고 기꺼이 쿨하게 자제할 줄 아는 미덕도 중요하다. 그런 경우라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뛰어난 배경의 역할을 잘 해낸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얻는데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로마시대 건축이론가 비트리비우스(Vitrivius)가 제시한 바 있는 건축이 다다라야 할 삼덕(三德)은 어떠한가? 이른바 견고함(firmitas), 편리함(commoditas), 아름다움(venustas)이 그것인데, 튼튼한 구조와 편리한 기능, 아름다운 형태를 동시에 이룰 수만 있다면 매우 훌륭한 건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삼덕은 ‘사람과 건축물 중심의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사유 영역의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집이 삼덕을 다 갖추었다 하더라도 대지와 주변 환경, 이웃이나 공동체와 잘 어울리는가 하는 문제까지 포섭하지 못한다면, 삼덕은 필요요건이기는 하겠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얘기다. 제대로 된 집의 덕목을 두루 갖추려면 그 사유영역이 땅-사람-하늘 끝에 다다르고, 그 사이사이에 맞닿아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지리와 생리, 인심과 산수를 소홀히 다루지 않고 함께 추슬러 그 지고의 경지에 다다른 집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식대로 에두르지 않고 콕 찍어 핵심 문장으로 요약해 표현한다면, ‘그 자리, 그런 집’이 아닐까 싶다. 아! 어쩌면 저리도 꼭 있어야 할 자리에 그럴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인지! 그렇다. 그것이 바로 지고의 경지를 드러낸 ‘스스로 그런(自然)’ 집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 쉽지 스스로 그런 집을 구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일까.  


하지만 그 자리에 걸 맞는 모습으로 지어지지 않은 집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마음을 얼마나 억압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잘 들어갈 만한 자리를 찾아 집이 잘 들어서야 할 텐데,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역참 누각은 사방이 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남쪽에 그중에서도 가장 놓은 구봉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매우 견디기 어려워 장난삼아 절구 한 수를 지어 함께 있던 손님에게 보였다[驛樓四面皆山也 其南有九峯山最高 當前擁寒 始來時頗不堪 戲作絶句 示伴客云] 


겹겹 산이 둘러싸 시름 얼굴 죄어드니 / 重巒匼帀逼愁顔

답답하기 언제나 옹기 속에 앉았는 듯 / 鬱鬱常如坐甕間

어찌하면 번쾌처럼 사나운 자 얻어서 / 安得猛如樊噲者

군화발로 구봉산을 걷어차 엎어볼꼬 / 靴尖踢倒九峯山

(다산시선집)


누구든 그 곳에 오르면 시름을 덜고 정신을 맑게 가다듬을 수 있도록 기능을 해야 할 역참 누각이거늘, 오히려 마음을 답답하게 짓누르기만 하니 오죽했으면 남쪽의 구봉산을 치워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장난기가 발동하여 누각이 들어설 자리가 아니었음을 집 지은 이에게 탓을 두지 않고 자연에 흠이 있는 것처럼 빗대어 시로 썼지만 '그 자리, 그런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구봉산을 어찌 깎아낼 수 있으랴. 마음을 조용하게 다스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끝내 다산 정약용 선생은 군산 앞에 용서를 청하셨으나, '그 자리, 그런 모습'으로 잘 지어진 누각 위에서 잠시나마 주거의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없었던 아쉬움이 얼마나 컸었겠는가. 


어찌 보면 다산 선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비들은 '그 자리, 그런 집'을 알아볼 줄도 알았고, 지을 줄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어떤 삶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를 스스로 찾고 행할 줄 알았으니, 그분들이야말로 모두가 타고난 건축가요 품격 높은 집주인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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