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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24. 2020

그 자리, 그런 집 (2)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동천석실

일러스트 김억중



바다에서 부는 만풍 향연을 끌어와서 
 높고 험한 산에 들어 석실 주변에 흩어진다. 
 옛 부뚜막엔 선악(仙樂)이 남아있고 
 움켜온 맑은 물은 차 사발에 꿇고 있네 
 
 석실 부엌에선 차 끓이는 연기 일고 
 구름인 듯 안개인 듯 꽃 주변을 맴도네 
 바람 따라 날아가 섬돌에 도로 남고 
 달빛에 실려 가다 냇물위에 머무네 


‘그 자리, 그런 집’의 내력을 좀 더 상세히 새겨보고자 거듭 고려와 조선을 대표할만한 선비이신 세 분을 여기 동천석실에 모셨다. 이곳 동천석실에서  고산은 다도(茶道)를 즐기며 부용동 전경을 바라보고 시가를 읊었다 하지 않은가. 작자미상의 「석실모연(石室暮烟)」이란 한시에는 고산이 해질녘에 차를 끓이는 연기가 선경처럼 보였다하니 그 날 역시 세 분 모두에게 얼마나 커다란 감흥이 석실 안을 물들였을지 짐작이 간다. 


 알고 보면 건축적인 사유의 깊이와 미학적인 눈썰미를 두루 갖추었던 백운거사 이규보(白雲居士 李奎報, 1168-1241), 기촌 송순(企村 宋純, 1493-1582),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 세 분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던 동시에 최고의 건축가였으나, 못난 후손이 명민치 못한 데다 식견마저 부족한 탓에 진즉 알아 뵙지 못한 죄 크다 하겠다. 참으로 뒤늦은 감이 있으나, 미천한 글재주와 상상력으로나마 선인들의 뜻을 대화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소중한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모년 모월 모시, 1평 남짓한 방에 모두가 둘러앉자마자 고산 선생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서화 한 폭과 필묵 그리고 가지런히 놓은 서책 때문인지 서권향 그윽한 동천석실의 에너지가 일순간 출렁였다. 산길을 따라 올라오느라 목이 말라 우선 반쯤 얼렸던 곡차를 한 잔씩 죽 들이키셨다. 이내 대장부 가슴이 확 트이듯 늘 뵙고 싶었던 반가운 마음에 가슴 속에 간직해 두었던 안부는 물론 각자의 화두를 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 저만치 물러서 있던 앞산도 문우를 여쭙듯 문턱 너머로 바싹 다가와 대작을 마다하지 않았다. 석실 뒷산 너머로 황금빛 잔영마저 토해낸 석양이 물러서고 제법 빠른 속도로 짙은 흑갈색 하늘이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때론 유리알 부딪히는 소리처럼 투명하게 세상만물의 이치에 대해 날선 논리를 내세워 토론도 하고, 고금의 사례와 견주어 작금의 정치 상황과 민심에 대해 함께 마음을 터놓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겠으나, 무엇보다도 세 분 사이 뜻 깊은 조우를 기념할만한 담론의 백미는 역시 대감들께오서 친히 이룩해낸 정자건축에 대한 이야기였음에랴. 대감들 사이 오고갔던 진언은 일렁이는 파도였으며 그 위로 처연한 달빛이 스며들어 방안 모습은 말 그대로 감각의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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