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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09. 2020

집부터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조심스럽게 꺼내보고 싶은 화두가 있다. 우리 시대의 '집다운 집', 그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집에 대해 말하려는 이유는 집이 먼저 바뀌어야 사람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도 바뀔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화가 반 고호는 낯선 이국땅에서 숨을 거둘 무렵 그의 고향 준데르트 마을 굴참나무에 늘어놓았던 어머니의 흰 빨래 모습을 회상했다고 한다. 평생 동안 그의 가슴 속에 잊지 못할 그림처럼 각인되었던 흰 빨래 풍경은 그의 외롭고 고단했던 삶을 추스르며 작가 정신을 치열하게 다질 수 있었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반 고호의 경우처럼 때로는 집주변 어느 장면 하나도 결코 사소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집이 지닌 깊고 깊은 속내를 이해하지 않고는 집다운 집을 그릴 수 없을 것 같다. 집 안팎 어느 구석엔가 삶의 충만한 의지와 빛바랜 추억을 가슴 속 깊이 새겨 줄만한 힘이 내장되어 있어야 비로소 집다운 집이라 할 수 있다. 


[졸작,  2009, 애물단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아이들에게 어떤 소중한 추억을 평생의 자산으로 선사해주고 있는 지 곰곰이 살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집에서 나는 삶의 계율을 익혔습니다/ 동그랗게 깎인 사과의 심장을 맛보았습니다/ 불가사의한 가족의 현, 그 나긋나긋한 갈등들을 호흡했습니다"라고 했던 김상미 시인의 '그 집'을 보면 내게도 그런 집다운 집이 있(었)는 지 되물어 보게 된다.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로 깊게 뿌리내린 그 집만의 비밀에 대해 반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집속엔 어떤 특별한 건축의 에너지가 함축되어 있기에 그만의 아름다운 추억을 이처럼 아름답게 고백할 수 있는 건지 부럽기 그지없다. 시인은 그 집속에서 삶의 계율을 익혔다 했으니 집은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 다름 아니었으며, 갈등을 곰삭히며 삶속의 온유한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가족의 성전이었음에 틀림없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어린 시절 그 집속에서 삶의 심장을 깊이 맛볼 수 있었다 했으니, 그의 풍부한 감성과 인성교육은 집에서 거의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시인의 8할을 다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집은 실로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시인의 집이 으리으리하거나 대단한 인테리어 장식으로 그득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시인의 심상 또한 알게 모르게 처마 깊은 건축의 형상을 그대로 닮아, 가족 간의 갈등을 포용하고 화해할 줄 아는 지혜도 자연스레 익혔으리라 여겨진다. "대청마루 한 켠에서 들려오던 엄마의 다듬이질 소리"와 "혀를 끌끌 차시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읽어 내리시던 아버지"의 그 자리, 그 디테일한 풍경들과 무언의 대화만으로도 삶의 계율을 자연스레 터득했을 법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손때 묻은 기둥이나 대청마루에 살을 맞대고 가족의 따뜻한 온기와 편안한 휴식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경건한 분위기가 자리했었을 터이다. 


그녀의 집은 삶의 진실, 그 행복과 지혜를 일깨우는 일상의 도량이었으며 나긋나긋한 현 소리처럼 늘 되살아나는 추억의 사원이었던 것이다. 그 누가 그런 집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부로 굴렸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자신을 시인으로 키워주었고 삶의 은총을 듬뿍 누리게 했던 그 집을 마음 속 깊이 고마운 존재로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면, 그 동안 우리는 집을 대하되 예의는커녕 하인 부리듯 돈 버는 수단쯤으로 막 대해오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앞선다. 


혹자는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하고, 또 어떤 이는 경제가 , 또 어떤 아는 교육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들 하지만, 내겐 다 공허하게 들린다. 아니다. "집부터 바로서야, 교육이 제대로 서고 그래야 정치며 경제며 이 나라의 기본이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우리 자녀들의 교육문제, 결코 학교나 정부가 마련한 제도나 정책만으로 쉽게 풀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보다 많은 아이들이 집다운 집에서 자랄 수 있어야 비로소 인륜의 기초 위에 교육의 근본이 올바로 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 안팎 구석구석 보고 느끼고 배우며 살아가는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집, 바로 그런 집속에 우리 시대의 밝은 희망이 담겨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젠 집을 짓더라도 그럴 듯한 겉모양에 휘둘리기보다는 뜸을 들여가며 '생각의 집'부터 튼튼하게 지어야한다. 


Republic of Lost Angelos에서

김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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