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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09. 2020

시인과 건축가

일러스트 : 김억중


시인과 건축가. 모두가 ‘짓는’ 천직을 타고 났으니 DNA부터 닮아있다고 해야 옳다. 실제로 요런조런 말을 가려 문장 속에 나르거나 요모조모 돌을 골라 벽체를 쌓는 것처럼, 매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들이 생각하고 표현해내는 방법이나 과정은 매한가지다. ‘그 자리’에 꼭 어울리는 ‘그런 언어’를 찾아 울림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시 짓기라면, 집짓기 또한 ‘그 자리’, ‘그런 공간’의 감동을 구축해가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결국 창작이라 함은 생각으로 짓는 ‘사유의 집’에서 말이든 형태나 공간으로 표현되는 ‘언어의 집’에 다다르기까지 우여곡절의 여정인 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의 집부터 튼튼하게 잘 지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유의 집이 부실하면 언어의 집 또한 금방 무너질 듯 추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사유와 언어가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도록 하는 일. 이를테면 이렇다 할 사유는 담고 있지 못하나 그럴듯한 언어의 옷을 입고 있다거나, 현란한 사유는 있으되 적절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아물지 못한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보여 가련하기 그지없는 꽃처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과 건축가는 안으로부터 상처를 뚫고 꽃을 피우듯, ‘사유의 집’에서 ‘언어의 집’을 끊임없이 오가며, 매순간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 고민하며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그 인고의 기다림 속에 사유와 언어 사이, 그 안팎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과정을 진정한 의미의 창작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정진규 시인이 말하는 꽃을 피우는 순서처럼.


"꽃이 피는 순서는 밖에서 안이 아니다 고마우신 햇살과 단비도 있으셨겠지만 안에서 밖이다 일단은 고여서 밖이다 눈으로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빠듯한 충만의 순서! 나는 그걸 아직 믿고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그걸 이직 믿고 있다" <몸詩, ‘상처’ 일부>


시인은 말한다. 꽃이란 안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라고. 그 속내의 상처가 절정에 다다라 밖으로 피어 오른 꽃을 보면, 무형의 사유가 침묵의 언어로 바뀌는 신비를 알 수 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가 있듯, 깊은 사유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시와 집이라면 내밀한 태생의 과정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의 변모.

잴 수 없는 것에서 잴 수 있는 것으로의 진화.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의 좁힘.

이(理)에서 기(氣)로의 발산.


생각은 형체가 없으므로, 사유의 집은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잴 수도 없다. 아이디어는 누구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므로, 사유의 집은 보편적인 세계요, 응결된 이(理)의 세계다. 잘 구축된 <사유의 집>은 <언어의 집>을 빌어 그 형체를 밖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언어의 집은 표현된 구조물이므로 볼 수 있는 존재이며, 크기를 잴 수 있는 실재다. 언어의 집은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만을 선택한 것이므로 개별적인 세계요, 용해된 기(氣)의 세계다. 


상처로부터 꽃이 피기까지의 빠듯한 순서! 그것이 바로 참다운 창작과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시인의 창작 노트나 건축가의 스케치를 보라. 종이 위에 꾹 눌러 쓰고 그린 자국에는 아름다운 꽃을 염원하는 두런거림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그가 그린 글자나 선들은 생각을 미처 따라 잡지 못한 형체의 잔해이며, 최선의 선택을 위해 몇 번이고 덧붙인 자해의 상처나 다름없다. 그 채근의 과정 없이 어떻게 아름다운 언어가 세상 밖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렇다. 시인과 건축가, 모두가 창작에 관한한 지고지난의 ‘꽃이 피는 순서’를 수행하며 ‘그 자리.’ ‘그런 언어’가 일치하는 극적인 순간, 그 감동을 포착해 내야만하는 공동운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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