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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09. 2020

아내는 육일거사[六一居士]

얼마 전 아내는 Bach의 바이올린 솔로 6곡[전곡]을 6년에 걸쳐 녹음을 마치고 자신의 분신이라 할 만한 CD*를 출반하며 이제사 음악인생의 정점을 찍었노라 기뻐했다. 나 역시 그녀의 거사에 마음을 다해 격할만큼 경의를 표했다. 어느 누구도 아내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 역시 음악계의 명성을 누리고자 했던 일도 아니었다. 산촌에 묻혀 좋아하는 일을 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 그저 자신과의 약속을 묵묵히 지키려 했을 뿐이었으니 더욱더 값진 쾌거가 아닌가.  누군가 그녀는 "바위 위에 핀 꽃"의 운명을 타고났다 했는데, 과연 지고지난한 역경 속에서도 끝내 그 찬연한 꽃을 피운 셈이었다.


일러스트 김억중


실은 아내의 버켓리스트가 무언지 나로선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목록 속에는 틀림없이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 이외에도 어디든 여행 떠나는 것을 즐겨했고, 미술을 좋아했으며, 역사책에 푹 빠지고도 하고 꽃을 보면 뛸 듯이 기뻐했으니 대략 이들 5가지와 관련된 주제가 들어있으리라 여긴다. 나는 기왕이면 아내가 좋아하는 5가지를 마음껏 즐기되 어떤 형태로든 집안에서부터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조선 중기 학자 정구(鄭逑 : 1543~1620)선생의 육일헌기(六一軒記)를 읽어주었다. 본문 속의 노인은 좋아하는 5가지 사물에 자신을 덧붙여 육일거사[六一居士]라 칭하거나 집 이름을 아예 육일헌(六一軒)으로 삼고 있는 데다 어떻게 커다란 주거의 기쁨을누리며 살고 있는지, 리얼하게 그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 옹이 이 집에 거처하는 것을 상상해 보건대, 초연히 홀로 앉아 책장을 넘기고 그 속에 몰입할 적이면 반드시 바깥 사물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남들이 맛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혼자 술을 따라 마시거나 또 혼자 한가로이 거닐 적에 자신의 흉금과 하나가 되어 어울리는 것은, 오직 동쪽 울밑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꽃과 추운 겨울 산마루에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와 물위에 어른거리는 성긴 그림자와 너울너울 춤을 추듯 흔들리는 맑은 그늘만 있을 뿐이며, 거기다가 또 진흙 속에서 나왔으면서도 맑은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가는 꽃이 있다. 이들은 각기 본성을 따로 지니고 스스로 나름대로의 세계를 온전히 보전하면서 서로 어울려 이 한 채의 집을 에워싸고 있다." [한강집(寒岡集)제 10권] 


기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육일옹(六一翁)이 좋아하는 5가지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옹이 5가지를 정성스레 울안에 들여놓고 무엇 하나 스쳐지나가듯이 보지 않고 흉금이 하나가 되도록 애정을 주어가며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놀라운 것은 그 5가지를 무작위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각기 본성을 따로 지니고 스스로 나름대로의 세계를 온전히 보전하면서 서로 어울려지도록 조직해 놓고 즐기고 있다는점이다. 다시 말해서 한 채의 집을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매우 구체적으로 디자인했다는 뜻이다. 집에 거처하면서 두고두고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다섯가지를 구석구석 상상하면서 주거의 기쁨을 그려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육일옹(六一翁)은 그가 염원했던 집다운 집을 얻어낸 셈이다.


아내가 거사를 이루어냈으니 나는 그녀가 5가지 좋아하는 것에 자신을 합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라는 별칭을 선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자꾸 불리다보면 애호하는 일들을 그저 상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다. 9부 능선을 넘어선 당신! 육일거사의 앞날을 더욱더 커다란 기쁨으로 즐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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