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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10. 2020

풍경의 완성

일러스트  : 김억중



과연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었다 내놓은(天生地作) 곳이라 여길만하면 옛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누정을 지었다. 거기서 즐기며 놀다가, 시심이 차고 넘치면 필묵을 들어 저마다 풍경의 묘미를 찬미하고 독특한 감흥을 적어 기문(記文)으로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런 글들을 읽다보면 상상 속으로나마 옛 선비들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꼈는지를 가늠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글 속에 묘사된 내용을 차근차근 이미지로 구축하다보면 어느 순간 선비들의 ‘사유하는 눈’과 마주친다.  


“내가 한 번 보니 향기로운 붉은 꽃과 푸른 잎의 그림자가 끝없이 펼쳐져 이슬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며, 연기 낀 파도에 일렁이고 있어 소문이 헛되지 않다고 할 만 하였다. 어찌 그뿐이랴? 푸르른 용산의 여러 봉우리가 처마 앞에 몰렸는데, 밝은 아침 어두운 저녁이면 매양 형상이 달라지며 건너편 여염집들의 집 자리 모양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으며, 지거나 이고, 타고나 걸어 왕래하는 사람들 중에는 달려가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다보는 사람, 손짓해 부르는 사람과 친구를 만나자 서서히 이야기하는 사람, 윗사람을 만나자 달려가 절하는 사람들이 또한 모두 모습을 감출 수 없어 바라보노라면 즐겁기 그지없다.....”


산이나 물, 나무나 화초, 그리고 해와 달 같은 자연을 노래하는 글은 얼마든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운금루기(雲錦樓記)는 누정의 풍경 속에 사람을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게 한 것이어서 그 감흥이 남다르다. 기문을 자세히 보면 용산을 둘러싼 원경과 누각 주변의 근경 모두가 일품이지만, 정작 조망의 초점은 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에 맞추어져있기 때문이다. 빼어난 경관은 배경으로 물러서 있게 하고, 사람을 풍경의 주인공으로 삼은 건축가의 시선이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다. 생각해보라. 저 거리 속에 파묻혀 아옹다옹 몸을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찌 사람과 사람사이 풍경이 눈에 들어올까? 게다가 궁벽 진 명승지가 아니라면 모를까 저자거리 풍경을 보고 즐긴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키 어려운 일일게다. 웬만한 이라면 눈길 줄 생각조차 못 할 자리에 운금루를 지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모습을 구경하고 즐길만한 장소로 등극 시킨 것은 전적으로 건축가의 능력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삶의 현장을 스쳐 지나치지 않고 진실이 담긴 경관으로 전이시키는 상상력. 

시답지도 않은 풍경을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풍경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집-사람-거리 사이, 조화로운 풍경으로 묶어낼 수 있는 디자인 공력. 

마침내 그들 사이 우연히 맺어지는 순간들을 즐겨 바라보며, 일상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품게 할 수 있는 마력. 그것이 바로 그가 보여준 건축의 힘이요 풍경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피어날 수 있다. 아니 그래야 정상이다. 이제껏 그러지 못했던 것은 사람과 집, 그리고 풍경 사이에 심각한 부조화가 있었다는 증좌다. 돌이켜 보건대 기능과 효율 위주로 숨 가쁘게 세워졌던 도시에서 사람은 늘 뒷전이었으며 풍경 속에 스며들지도 못한데다, 주인으로서 그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하지만 애정 어린 시선만 갖춘다 해서 그저 그런 일상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선뜻 다가오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럴만한 장소를 잘 찾아 시설을 배치하고, 전망의 초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세부구성이 뒤따라야 한다. 집집마다 다투듯이 재료도 다르고 높이도 다르고 몸집도 제각각인데다 색깔마저 튀기 시작하면 아름답던 풍경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줄 만큼 우악스럽지 않아야, 어떤 사람이든 그 풍경 안에 들어와도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 그만한 디자인의 완성도가 있어야 소소한 일상까지도 가치 있는 풍경으로 거듭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목석같은 영혼을 흔들어 깨울 수 있는 감동의 여지가 생긴다. 그럴 때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라거나, ‘사람을 완성하는 것은 풍경’이라는 말이 제 격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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