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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Jan 27. 2021

건축, 지고의 경지는 무얼까

안견의 사시팔경도




안견, 사시팔경도 만추 15세기 화첩 비단에 담채 35.2×28.5cm


 

1.

안견(安堅, 생몰미상)의 사시팔경도를 보면 건축가인 내가 봐도 집이 들어갈 만한 자리에 영락없이 집이 그려져 있다. 화면 가운데 우뚝 선 바위 위의 정자는 주변 경관을 향해 활달하게 열려있어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근, 원경이 형형색색 서로 다른 장관을 드러내니 눈이 얼마나 호사로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꼭 그럴만한 크기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10여명은 족히 앉아 오랜만에 계회(契會)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바위 왼편 아래에는 일상적인 주거공간이 주변 환경으로부터 안온하게 감싸여 있어, 정자와는 또 다른 정경과 대면하고 있다. 서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놓여있지만 대지 고도가 다르고 주변 환경을 향해 열려있는 상황이 달라 정자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과 주거공간의 그것은 서로 다른 가치가 있어 좋다. 정자나 주거공간이나 그 장소가 지니는 매력이 비슷비슷하다면 그냥 집에 머물러 있지 정자는 무엇 하러 애써 올라갈 것인가.

 

그런가 하면, 오른 쪽 상단의 도성 모습은 또 어떠한가. 정자에서 그 쪽을 바라다본다면 자연의 비경과 인위의 건축물이 상생하며 이루어낸 조화는 그저 멋진 그림처럼 겉으로만 보는 삶이 아니라 아예 그림 속에서 사는 삶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정자에 모인 선비들은 음풍농월의 가무도 즐겼겠지만 원경에 포착되는 도성을 바라보며,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고 나라의 장래에 대해 허심탄회한 토론을 이어갈 수 있는 공간구조가 아닌가.



2.

세상에서는 좋은 그림을 일러 본디 ‘핍진하다’고 하지만 좋은 경치를 이를 때에도 반드시 ‘그림 같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찌 좋은 산과 빼어난 물 등 아름다운 풍경은 한곳에 모두 갖추어지기가 어렵고, 혹시 그런 곳이 있다 하더라도 깊은 산중에 있어 인적이 미치기가 어려워 그러한 곳에 촌락이 형성되고 백성이 정착하여 닭과 개가 짖어 대고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라 정감 있는 물색이 어우러지게 되는 것은 더욱 쉽지가 않은 법인데, 화가는 마음 가는 대로 경물을 배치하고 모아 놓을 수 있는 까닭에 이따금 붓끝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해 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선생이 산속에서 각건(角巾)을 쓰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구곡 안에서 배회하는 그곳은 곧 그림 속의 광경이요, 선생이 산을 나가 문을 닫고 안석에 기대어 그림을 감상하는 그곳은 곧 현실의 구곡이 아닐까? 현실과 그림을 또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김창협(金昌協,1651~1708)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 발문, 농암집 25권]

 

 

3.

기적처럼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생각하며 살았다

순서가 없는 일 이었다

집터가 없을 때에 내 주머니에 있는 집,

설계도를 본 사람 없어도

집 한 채가 통째로 뜨는 창은

미리 완성되어 수면에 반짝였다

나무 야생화 돌들을 먼저 심어

밤마다 소금 별들과 무선 전화를 개통해 두고

허가 받지 않은 채 파도소리를 등기했다

하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출입문 낼 허공 옆 수국 심을 허공에게

지분을 떼 주었다

제 안의 어둠에 바짝 붙은 길고긴 해안선을 타고

다음 항구까지 갈 수 있는 집의 도면이 고립에게서 나왔기에

섬들을 다치지 않게 거실 안으로 들이는 공법은

외로움에게서 배웠다

물 위로 밤이 오가는 시간 내내

지면에 닿지 않고 서성이는 물새들과

파도의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가식으로 정렬된 푸르고 흰 책등이

마을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황학주, 「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 일부]



4.

농암 선생이나 황학주 시인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화면 안에 집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잘 구축한 화가 안견의 공간경영 능력을 보면, 그 또한 사려 깊은 건축가라 할만하다. 그런 그의 그림에서  얻어야  할  값진 교훈은 건축,그 지고의 경지란 결국  '그 자리, 그런 집'의 형국에 다다라야 가능하는 사실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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