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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Jan 21. 2021

집, 잘 열고  닫아야

창문에 대하여


일러스트 김억중


그 옛날 아주 작고 소박한 선비의 집을 보아도 창문은 삶의 소소한 감동의 장치였음을 알 수 있다.

  

깊은 밤엔 눈빛으로 창문이 온통 하얗더니 / 夜深雪色爲渾白

새벽엔 아침 햇살 끌어와 불그레해지누나 / 曉引朝暉欲軟紅

일생 동안 창문이 밝았다 어두웠다 한 속에 / 百歲窓明窓暗裏

이불 쓰고 꿇어앉은 일개 시 짓는 늙은일세 / 擁衾危坐一詩翁

[서거정(徐居正), 지창(紙窓), 사가시집 3권]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시를 보면, 시인의 집 창문 위에 창호지를 발랐는지 빛의 색깔과 농도는 매 시간 다른 모습을 띤다. 창호지 문살에 돋는 달무리에서 새벽 여명까지, 느낌이 서로 다른데다 눈 올 때 빛이나 아침 햇살이 저마다 다르다며, 사시사철 대조를 이루는 정감만으로도 창호지문 덕분에 늙도록 시를 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그 창문은 집의 외관을 이루는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지창을 투과한 빛의 밝기와 색깔에 따라 그 미적 감흥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또한 삶의 소중한 부분이라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겉멋에 휘둘리지 않고 창문의 향이나, 크기, 재료 등을 고민하여 조심스럽게 마음을 움직일만한 그 자리, 그런 모습의 창문을 상상해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나희덕의 시, ‘불 켜진 창’의 경우는 어떤가. 어느 날 시인이 퇴근하고 돌아오던 날 저녁 무렵. 예정된 일정을 재촉하듯 잉크 빛 어두움이 칠흑 같은 둥지를 트느라 여념이 없는 시간, 그이가 길모퉁이를 돌아 낮은 담장 안쪽 작은 텃밭을 낀 건넌방으로부터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에 걸음을 멈춘다. 그날따라 그 모과(木瓜) 빛 창문 모습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이는 불빛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문이 아닌 창 쪽으로 가서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듯 집안을 샅샅이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큰 아이와 아빠는 티격대격 장기를 두고 있고, 작은 아이는 자고 있는 듯, 접시에 남아 있는 과일은 아직 물기조차 마르지 않았고(아! 아빠의 자상함/책임감이여!), 난로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는 김이 오르고 있다(아! 삶의 안락함/편리함이여!). 불빛으로 넘쳐 나오는 것은 일견 따뜻한 행복과 평화같은 것일진대, 음, 그래. 하지만, 나 없으면 쩔쩔 맬 줄 알았는데도 집안은 그럭저럭 잘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순간 그이는 가슴이 허전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저 뒤숭숭한 감정을 어찌 할 수 없다했다. 


“나는 한 마리 나방인 듯이

창문에 부대껴 서서 생각 한다

그 익숙한 살림살이들의 낯섦에 대하여

부르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의 아득함에 대하여

내가 없는 세상의 온기 또는 평화에 대하여”

(나희덕, ‘불 켜진 창’) 

 

그이가 몇 시에 집에 들어오던 아랑곳 하지 않는 저 창문 안쪽 세계의 가깝고도 먼 아득함이여! 이렇듯 집안에서 고작 나방 같은 신세로 느꼈을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시리디 시렸을까. 허무하기만한 심정을 달래며 몰래 카메라를 접으려 했던 그이가 다시 눈을 들어 방안을 들여다보니, 아니, 이럴 수가. 큰 아이가 자꾸 시계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 녀석이. 순간 가슴이 뭉클하고, 벌써 뺨에는 한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야 말았을 터. 안 봐도 비디오가 아닌가. 그래 얘야, 엄마 여기 있단다하고 당장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내 새끼를 껴안아 주고 싶지만, 그날 밤 그이는 나방처럼 어둠 속에 숨어 오래오래 “불 켜진 버스처럼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그 창문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단다. 


시인의 집 담벼락에 난 작은 창이 만일 온통 유리창이었다면 이토록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을까. 물론 시인의 집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고려해서 절묘한 모습의 창을 낸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과 달리 시인의 뛰어난 감수성이 작동하여 그리 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창문’과 ‘그런 삶’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인해 분명 소소한 감동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키 어렵다. 그렇다면 창문 하나를 그리더라도 어찌 그와 연관된 삶을 생각하지 않고 외관의 멋만 취하면 그만이라며 막 그릴 수 있겠는가. 그럴 때 건축가의 손재주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

 

이윤기의 소설 “유리 그림자”에 나오는 창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집은 산속에 있는지라 새들이 참 많은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종종 창문 앞바닥에 죽은 새가 떨어져 있다고 한다. 원인은 집안에서 산속이 훤하게 보이도록 잘 닦아 거의 완벽하게 투명한 거실과 서재의 통판유리 때문이란다. 새들이 판유리에 비친 숲을 진짜 숲으로 오해하여 날아들다 참변을 당한 것이다. 허긴 유리문에 부딪혀 중상을 입거나 즉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보도를 보면 비단 지능지수 낮은 새들만의 문제가 아닌 듯. 그림자조차 허락하지 않은 올 글라스 미학이 삶을 억압하고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다. 요즘 들어 전면을 벽 대신 투명 유리로 채워 내부가 온통 다 들여다보이는 집이 부쩍 늘어가고 있다. 창은 사라지고 투명한 외피가 대신하고 있다. 


내부가 다 드러나 보여 집 속의 내밀함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불빛은 밖으로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기보다는 게걸스럽게 뿜어 나온다. 밤에 내리는 어둠은 집을 축복하기는커녕 제 갈 곳조차 찾지 못하고 건물주변을 서성인다. 어둠과 불빛이 한 몸을 이루어 내지 못하고, 불빛만이 기승을 부려 잠 못 이루는 밤을 부추긴다. 극도로 환한 불빛은 밤만이 선사하는 고유한 낭만을 앗아갔다. 


어디 그 뿐인가? 길가의 카페 같은 건물일수록 집안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시선이 퍽이나 공격적이다. 뻔뻔한 세태의 반영일까. 여간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그런 집 앞에서 서성이거나 안을 들여다 볼만한 자유와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너무나 투명하여 누군가가 숨죽여 울만한 공간이 없다. 낯선 이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지, 내뱉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더 많이 열려있으면서도 사실은 더 많이 닫힌 모습이다. 오직 안에서 밖으로의 시선만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문은 있으되, 소통의 본래 뜻은 증발해버렸다.

 

“열린 창이여, 나는 너를 통해 아무것도 내보낸 것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구나“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4’ 부분]


풍경이 집안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데, 필터처럼 고마운 창문이 있어 그들을 취하기도 하고 걸러내기도하며, 거리를 가깝게 혹은 멀리 유지하기도 하여 모쪼록 세상과 지혜롭게 소통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창문을 어떻게 열고/닫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장식하느냐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창문을 열고 닫는 것은 곧 세상을 열고 닫음에 해당하는 일이니, 결코 소홀히 다룰만한 사안이 아니다. 그렇다. 벽이든 창이든 잘 열고 동시에 잘 닫지 않으면 그 자리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죽음의 사막으로 변질된다. 창문의 경우만 하더라도 삶과 형태 사이의 관계가 막역한 것이라면, 대뜸 집 모양부터 그릴게 아니라 삶부터 꼼꼼하게 살펴보아야할 터이다. 건축은 결국 삶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건축형태가 멋진 외관을 위해 기능하는 것 이상으로 더 커다란 주거의 기쁨에 복무해야 정상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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