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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Jan 04. 2021

집에 대한 경의 (2)

유죽헌(柳竹軒)


유죽헌기(柳竹軒記)


무릇 하늘과 땅과 사람 사이, 끈끈한 인연을 맺어주는 것이 건축의 본령이라 여겨왔다. 내 이웃들이 집다운 집을 지으며 모두가 주거의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나로 때로는 설계에 매진하기도 하고, 책을 펴내기도 하거니와 전시회나 무대공연을 마다하지 않고 대중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내가 집주인을 만나게 된 인연도 한국화학연구원 특강이 파할 무렵, 강단으로 달려 나온 조박사께서 좋은 집을 얻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된 셈이었다. 모든 일이 열망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눈빛에 담겨 있던 간절한 염원만으로도 이 분은 이미 집다운 집을 지을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하기동 일원에 대지를 구하는 일부터 함께 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점지의 기회를 맞이하였으니, 천운이 함께 하였음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대지 오른 편에는 제법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버드나무는 한 쪽으로부터 바람이 스쳐 가면 늘어진 온 몸이 한 방향으로 휘었다가 곧이어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다. 크고 작은 세파에 흔들리는 저 버드나무는 한 시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 않지만 늘 본래의 제 모습으로 반듯하게 되돌아온다. 유연하게 흔들려도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 저 모습이 바로 버드나무의 진면목일 터.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의〈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 “집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기에 이를 나 자신의 호로 삼았다.[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라는 말이 나오는데, 버드나무는 지취(志趣)가 고상한 은사(隱士)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 아니던가. 집주인은 이제 저 버드나무와 벗이 되어 맑고 고운 성정을 다스리며 집안 곳곳에 상서로운 기운을 전수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꿈속에서도 버드나무는 늘 거기 서있었고, 설계는 그 버드나무로부터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었음에랴. 버드나무 옆으로는 늘 푸르른 대나무를 심어 집안 깊숙이 들어가기 전 안마당을 끼고 도는 고샅을 만들어 “아! 이제 집에 돌아왔구나!”하는 내면의 깊디깊은 안도를 응시하며 시시각각 변모하는 빛과 그림자의 운행과 더불어 집 안팎을 드나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러했다. 


예로부터 선비가 벗할만한 나무를 일컬으며 유죽매송사미전(柳竹梅松四美全)이라 하지 않았는가. 나는 버드나무와 함께 즐길 만 한 나무로 소소한 바람 소리를 품게 될 대나무를 선뜻 골랐다.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곧게” 두 나무가 은유하는 지혜를 살펴보아도 부부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더불어 마음속에 진드근히 품을 만하지 않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여 길가에 줄지어 늘어서게 된 대나무는 길가의 행인들에게는 보고 듣는 즐거움을 줄만 한데다 울안에서는 잡다한 세상으로부터 청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될 만하니 이보다 더 나은 방책이 따로 없었다.


대나무로 둘러쳐진 안마당은 다시 ㄷ자로 채워진 본채와 별채 사이를 비워 안온함과 내밀함을 더했고 거기에 대청마루와 거실, 주방, 서재로 이어지는 공간구성은 깊은 물과 도랑물이 함께 흐르듯 가족 모두 때로는 홀로 때로는 함께 저마다 삶의 평화와 고요, 그리고 행복이 그득하기를 염원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삶을 짓는 것이 건축이라 늘 말하여 왔으니, 집주인과 가족의 삶에 대해서도 서술해야 마땅할 터. 안채와 별채는 거실을 중심으로 동서방향으로 두 날개를 이루되 저마다 ‘집속의 또 다른 집’처럼 공간의 크기도 모양도 빛의 양과 질도 서로 다르게 구성하였다. 그래야만 했던 것은 전적으로 지형, 지세가 ‘그 자리,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유난히도 햇빛을 그리워하는 안주인을 위해 안채를 오른쪽 날개에 두고 별채를 본채보다 낮추어 한 겨울에도 마당 안이나 안방으로도 직사광선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여 한기와 온기가 공존하며 평형을 이루게 하려 했던 것. 그로 인해 단층이기는 하나 층고가 제법 높아진 별채는 특별한 세계를 이루었으니 여기에 기거할 이에 대한 집주인의 각별한 배려와 애정이 담긴 공간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만하면 ‘그런 사람, 그런 삶’이 스며있는 집을 지은 셈이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10살 해준이로 하여금 저 멀리 우주 스케일에 닿을 만큼 깊은 시선을 간직한 2층 방에 기거토록 하고 감히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라 할 만한 서재를 마당 크기만큼의 폭으로 길게 펼쳐 놓아 아빠와 함께 공부하기도 하면서 아래층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는 물론 요리 냄새에 이르기까지 그 세세한 디테일까지 평생을 가슴 속에 묻어둘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가길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부디 크게 성장한 훗날 “그 집에서 나는 삶의 계율을 익혔다”던 김상미 시인처럼 자신을 키웠던 8할이 유죽헌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설계를 마친 어느 날이었던가 귓가에 때 아닌 매미 소리가 그득하더니 일순간 버드나무 가지가 꺾이는 꿈에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공 과정 중에 버드나무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니 커다란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당초 “버드나무 늘어지고 바람은 온화한데 달이 못에 가득하네[楊柳風暄月滿潭]”라는 시구를 떠올리며 마당 끝자락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두었으나, 이젠 사라진 버드나무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더 애틋하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랄 밖에. 어찌 하랴.


비록 버드나무는 잃었으나 그래서 더욱 더 그 뜻을 잘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꼭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집주인께서는 대나무를 보면서도 버드나무를 상기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잘 살펴가며 그 속에 배인 삶의 지혜와 주거의 기쁨을 더 크게 누리시길 마음 속 깊이 기원하는 바이다.


어느 날 
버드나무와 대나무가 
지들끼리 두런대며 
속삭이기를...


하늘과 땅, 그 사이 
간 보이느라 
10평 빈 마당,
방금 전
새 한 마리 다녀갔다.


빛과 그림자, 그 사이 
느낌 당겨오느라
40자 넘는 벽체,
하루 종일
물들여 놓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그 사이 
추억을 버무리느라
5M짜리 식탁,
그릇들끼리
얼싸 좋아 부딪히고 있다.


세상은 돌고 도는데
돌지 않는 집이 있으니 
집이 곧 세상의 중심이라.


하물며 집주인은...


2016년 6월 12일
김억중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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