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소피아 대사원
스승이나 다름없는 훌륭한 건축물과 도시공간을 만나보고 싶어 오랜만에 답사의 길을 나섰다. 첫 여정지인 이스탄불 구도심 호텔 방 창밖을 보니 블루모스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기도 시간인 듯 확성기를 통해 경건하게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린다. 부박하기 만한 속세의 삶 속에서도 시간을 정해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곳. 회색빛 사원의 도시, 이스탄불!
여장을 풀고 잠시 쉴 겨를도 없이 세계적 명품건축물로 유명한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대사원을 보러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스탄불 시내로 들어와 이번 여행 제일 첫머리에 만나고 싶었던 건물이기 때문이다. 햇빛이 잦아든 을씨년스런 날씨 탓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과 그림자의 게임을 지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직조된 공간과 형태 사이, 'Touch me, if you can'이라 조잘대며 지들끼리 판을 벌리는 그 오묘한 게임을.
대사원에는 당시로 치자면 직경 32m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을 중간에 기둥 없이 덮어씌울 수 있었던 혁신적인 구조시스템과 기하학적 규율이 지배하는 공간 시스템의 부창부수[夫唱婦隨], 그 상응의 조화를 지켜볼만한 경이로움과 장엄미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답사를 하는 내 마음은 왠지 흡족하지 않고 사뭇 아쉬웠다. 우리들의 눈높이에 '짠!'하고 펼쳐진 저 경이로운 장면은 깊고 깊은 속내를 입구에서부터 이미 한꺼번에 다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으니 볼장 다 본셈. 곳곳을 둘러보아도 고만고만한 장면들만 차고 넘쳐난다. 양기가 팽배한 모습에, 오묘한 음양의 조화는 찾아볼 수 없는데다 은폐와 노출을 통해 다채로운 건축적 장면들을 교묘하게 통합해 낸 동선의 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게 당연해 보인다.
물론 사람의 손이 쉽게 닿지 않은 곳까지 구석구석 가꾸어놓은 모자이크나 장식판에 담겨진 어마어마한 수고로움과 장인정신! 그런 것도 감탄과 찬미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명품이 지녀야할 덕목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평면구성은 아쉽게도 기도하는 예배공간(신랑, 주요공간, nave)/서비스공간(측랑, 종속공간, aisle)을 기능적으로 구분한 것 이상의 의미를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그 둘 사이 극적인 대비를 찾아볼 수 없어 긴장과 이완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변공간을 서성이다가 중심공간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그 크기나 규모를 다 짐작해버렸으니, 쿠폴라로 뒤덮인 저 천상의 세계를 향해 힘껏 고개를 뒤로 젖혀 쳐다보아야만 할 경이로운 제스추어가 불필요해진 셈이다. 상대적으로 작고, 조밀하고 낮으며 어두운 주변 순례공간과 달리 중심 예배공간은 크고, 비어있는데다 높고 밝은 빛이 충만한 차이가 훨씬 더 뚜렷하게 구현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말이다.
좀더 정확히 지적하자면 측랑 1층은 적어도 한 층 이상 덧붙여질만큼 더욱더 낮고 촘촘하게 구성되었어야 했다. 중심은 중심답고, 주변은 주변다워야 그 극적인 차이로 인한 진한 감동과 전율이 온몸을 감싸오지 않겠는가. 그 짜릿한 감동을 기대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명불허전[名不虛傳]이 아니라 명이허전[名而虛傳] 아닌가.
혹자는 용도가 중요하지 무슨 감동이 필요하느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건축역사상 주어진 용도를 충분히 잘 수행하면서도 극적인 감동을 내장한 건축물이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명품이라면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용도가 무엇이든, 무한 감동의 장치로 작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겐 유명하다는 평판보다는 감동이 있고 없느냐가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소피아 대사원은 고전처럼 불멸의 텍스트이기는 하되 아쉽게도 커다란 스승의 표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뭇사람에게 잘 알려진 명성대로라면 지상에 스승은 너무나 많아 보인다. 하지만 진정으로 큰 스승이 드문 이유는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열고 닫을 만큼 독창적이면서도 시공을 뛰어 넘어 감동의 장치가 제대로 내장된 건축물이 그리 흔치 않은 때문 일게다. 이스탄불에서 내 발걸음은 자못 무겁기만 하다. 진한 포도주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