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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Feb 09. 2021

고려시대, 공공디자인 해법

이제현(李齊賢)의 운금루(雲錦樓)


과연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었다 내놓은(天生地作) 곳이라 여길만하면 옛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자리에 누정(樓亭)을 지었다. 거기서 놀다가, 시심이 차고 넘치면 저마다 독특한 감흥을 적어 기문(記文)으로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런 기문을 차근차근 살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고수들의 ‘사유하는 눈’과 마주치는 행운을 얻곤 한다. 건축을 통해 삶과 풍경 사이, 그 절묘한 관계를 읽어내는 혜안으로 치자면 선비들이야말로 당대의 훌륭한 건축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일러스트 김억중


그 중에도 자연의 풍광을 대상으로  감흥을 노래하는 기문은 얼마든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운금루기(雲錦樓記)가 남다른 것은 잘 디자인 된 정자의 풍경 속에 저자거리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활짝 핀 꽃처럼 생생하게 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밝은 아침 어두운 저녁이면 매양 형상이 달라지며 건너편 여염집들의 집  모양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있으며, 타거나 걸어 왕래하는 사람들 중에는 달려가는 사람, 쉬는 사람, 돌아다보는 사람, 손짓해 부르는 사람과 친구를 만나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 윗사람을 만나자 달려가 절하는 사람들, 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즐겁기 그지없다.”


정작 선생의 시선이 궁극에 다다른 곳은 누정 주변의 빼어난 자연 풍광보다는 오히려 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풋풋한 삶의 정경이었다. 어찌 보면 그냥 스쳐지나갈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었겠으나 선생은 삶의 현장 자체를 진실이 담긴 가치 있는 경관으로 여겼던 셈이다. 


하긴 저 지저분한 거리 속에서 아옹다옹 몸을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찌 사람과 사람사이 일상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그 하찮은 정경을 보고 즐긴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키 어려운 일일게다. 그래도 풍경을 마주하되 스쳐 지나듯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따뜻하게 아우르려는 연민의 시선이 있다면 굳어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 법하다. 시인 허만하의 지적처럼 영혼이란 풍경을 마주하며 깨어나는 자기의 또 다른 모습이므로 풍경은 어디든 널려있지만 세상을 바라다보는 이의 시선이 늘 문제인 셈이다.


하지만 애정 어린 시선만 갖춘다 해서 그저 그런 일상의 모습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선뜻 다가오는 것은 아닐 터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온갖 행태가 흥미로운 드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오게 하려면, 그럴만한 장소를 잘 찾아 운금루를 배치하고, 전망의 초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세부구성이 뒤따라야 한다. 그만한 건축의 완성도가 있어야 소소한 일상의 모습까지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거듭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목석같은 이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은 굳이 궁벽 진 명승지를 찾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 한가운데서 진실로 구경하고 즐길만한 풍경을 얻어낸 건축가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어설픈 건축가였다면 정자란 본디 멋진 자연경관을 담는 것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백성들이 사는 모습 자체를 무시해버리거나 아예 의미 있는 풍경으로 끌어드리려는 생각조차 감히 해보지도 못했을 터. 그런 이라면 운금루 자리를 보고도 그 자리에 숨겨진 놀라운 가치를 발견해낼 리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선생은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즐기는 바를 즐기되,..자기 자신은 물론 남까지도 즐겁게 하니 참으로 가상할만한 일이다.”하였으니, 운금루야말로 대중을 위한 공공시설 디자인의 백미였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시답지도 않은 풍경을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풍경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서로 다른 사람들과 집 그리고 거리에 이르기까지, 풍경 속에  모두 하나 된 모습으로 묶어낼 수 있는 마력. 그들 사이 맺어진 소중한 순간들을 즐겨 바라보며,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품게 할 수 있는 저력. 그것이 건축의 힘이요 풍경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교감했던 것이다.


기문이 쓰인 지 칠백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운금루같은 훌륭한 공공공간에서 행복을 누리며 잘 살고 있는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껏 그러지 못했다면 자연-도시-거리-집-가구들 사이에 심각한 풍경의 단절과 부조화가 있었다는 증좌다. 그러므로 운금루에 새겨진 '그 자리', '그런 삶', '그런 모습'의 디자인 원리가 곳곳에 스며들어야 비로소 풍경의 은총을 맘껏 누릴 수 있는 법이니, 공공디자이너들이 곱씹어 보아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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