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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Nov 14. 2023

만약 내 아이가 괴물이라면?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을 위해 꼭 해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육아가 너무 버거웠기에 아이를 한 명만 낳아 키우고 있지만, 아이가 없는 가정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식을 키우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식은 존재 자체로 부모의 기쁨이고, 삶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으며 내가 갖고 있던 상식에 금이 갔다. 만약 내 아이가 괴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넓은 저택에서 많은 자식들을 키우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삶이 행복이라고 믿는 두 남녀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런던 변두리의 마당이 있는 호텔 같은 큰 규모의 집을 구입하고, 많은 자식들을 양육하기에 그들이 갖고 있는 시간과 돈은 현저히 부족했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부모가 있었다. 남편 데이비드는 어머니와 이혼한 부자 아버지로부터 돈을 지원 받아 본인들에게 과분한 신혼집을 구할 수 있었다. 아내인 해리엇은 어머니의 노동력을 육아에 투입해 다자녀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주변 어른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자식을 네 명이나 낳았고, 본인들이 믿고 있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갔다. 휴가 때마다 그들의 큰 저택은 친척들로 붐볐고, 아이들은 사촌들과 어울려 넓은 마당을 뛰어 다녔다. 휴가 때 필요한 각종 비용과 많은 식구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 역시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를 키우는데 부모의 지원과 도움은 필수적이다. 해리엇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들 역시 내심 과부인 엄마가 자신의 집에 함께 거주하며 본인과 손자들을 돌봐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휴식 기간도 없이 계속해서 아이를 낳는 해리엇을 보며 그녀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바로 임신을 하려는 딸이 안스럽지는 않았을까? 해리엇의 어머니는 이제 그만 아이를 낳았으면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전했다. 최소한 출산 사이에 어느 정도의 휴식기를 두기를 바랐다. 설상가상으로 해리엇의 여동생이 다운증후군 증상의 아이를 낳으며, 엄마는 해리엇을 떠나 동생네로 떠났다. 


 그럼에도 주인공 남녀에게 자식은 축복이었고 행복의 보증수표였기에 그들은 다섯 째 아이를 갖는다. 부모의 도움으로 근근히 가정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행복한 가정이라는 환상 속에 갇혀 무리한 선택을 내렸다. 그런데 다섯 째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해리엇은 자기 뱃속에 있는 생명체로부터 공포를 느꼈다. 의사를 찾아가 아이의 움직임을 진정시켜 줄 약물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물론 의사는 그런 해리엇을 이상하게 여겼고, 그녀의 모성애를 의심했다.


 다섯째 아이는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다. 다섯 째 아이의 이름은 벤이다. 벤은 큰 체격으로 태어나 보통의 아기들과 달랐다. 성장 과정에서부터 그는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다. 성정이 난폭하고 식탐이 커서 해리엇을 힘들게 했다. 벤에게 젖을 먹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타고난 폭력성으로 인해 벤은 집안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부모조차 벤을 두려워했다. 기괴한 목소리로 포효하는 벤의 모습에 형제들 역시 그와 거리를 두었다. 친척들 역시 대놓고 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벤이 태어난 후부터 그 집에 발길을 끊었다. 


 형제들은 벤이 자신들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잠들기 전에 문을 잠그었다. 데이비드는 이질적인 벤을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해리엇 또한 벤이 사피엔스 안에 잠재되어 있던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타고 난 것이 아닌가 하는 공상과학적인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 벤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가족들과 달리 학교, 병원에서는 벤을 정상적인 아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해리엇을 제외한 가족들은 벤을 집에서 격리해 보호소 같은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데이비드는 나머지 정상적인 자녀들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자신과 해리엇을 설득했다. 하지만 엄마인 해리엇은 벤과의 생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본인을 제외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벤을 보호소로 보내기를 원했기에 그녀 역시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성애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결국 약물에 의해 아이들을 통제하는 열악한 보호관찰소 시설에 감금된 벤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벤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해리엇 혼자 짊어져야 했다는 것이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벤의 문제 행동에 심각성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가 함께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직 엄마인 해리엇만이 자기가 직접 낳은 자식이 괴물이라는 죄책감을 뒤집어 써야 했다. 데이비드와 아이들에게 벤은 더 이상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다. 해리엇이 벤을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만들기 위해 애를 쓴 만큼 나머지 가족들과 멀어져야 했다. 작품 초반만 해도 꽤나 비중이 컸던 남편은 이제 병풍 수준으로 전락했고, 첫째와 둘째는 일찍부터 집을 떠나 독립했다. 


 그 중 가장 큰 피해자는 넷째 폴이다. 다섯 째의 존재로 인해 엄마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엄마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병들어 갔고 매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인류가 만든 가족이란 제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서도 나와 다른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겹고 폭력적인지를 알려주었다. 결국 다섯 째 아이로 인해 해리엇이 꿈꾸었던 행복한 가정은 파괴된다. 아이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아이들 교육비 문제로 인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던 남편은 매일 늦게 집에 들어왔고, 큰 저택에는 해리엇과 벤, 그리고 넷째 폴만이 남게 된다. 벤과 폴은 엄마인 해리엇의 노고를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벤들이 떠올랐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뛰쳐 나가는 학생, 하루 종일 시체처럼 엎드려 자는 학생, 작은 관심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학생,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피해 입는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학생 등등. 해마다 지도하기 어려운 학생을 만나는 것은 교사라는 직업이 가진 숙명이다. 힘든 학생들을 상대할 때마다 그들의 부모님을 떠올린다. 나는 언젠가 헤어질 계약 관계에 불과하기에 1~2년 후면 그와 마주칠 일이 없다. 하지만 부모 자식 관계는 쉽게 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모는 평생을 금쪽이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돌보고 보살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있다. 사회는 아빠보다 엄마에게 더 큰 의무감을 부여한다. 


 문제아의 행동은 어릴 때 부모의 잘못된 양육 과정의 영향을 받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부모와 환경과 상관없이 애초에 금쪽이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까? 소설 속 벤의 폭력성과 반사회성은 타고난 것이다. 첫째부터 넷째까지의 모습을 보았을 때 부모가 조성해 준 양육 환경과는 큰 연관이 없었다. 그런 벤을 엄마인 해리엇만이 끝까지 품어준다. 하지만 과연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모성애라는 사회가 만든 관념이 부과한 의무감은 아니었을까? 


 소설을 읽으며 남들과 조금은 다른 벤을 온 가족이 이해해주고 품어주기를 바랐다. 그 과정에서 부모와 형제들이 성장하기를 희망했다. 그것이 살면서 내가 배웠던 상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나와 다른 존재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에드워드와 해리엇을 이미 네 명의 자녀를 양육하며 많이 지친 상태였다. 정신병이 있는 아이,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 폭력성이 두드러지는 아이가 내 자식라면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하고 지도했을까? 일반인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사회적인 언행을 일삼는 학생이 우리반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한편 주호민 웹툰 작가의 특수교사 고발 사건으로 세간이 떠들석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권력, 여론력, 재력 등을 지닌 학부모가 월급이 전부인 교사를 약자로 만들어 매장하려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호민 작가의 아이와 발달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이 될 정도 여론이 좋지 않다. 특히 여론을 조장하는 언론의 행태를 보면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성욕을 절제하지 못해 시도 때도 없이 바지를 내리고,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괴물로 묘사되고 있다. 교사들 역시 자신들을 비호하기 위해 학교에 금쪽이들이 얼마나 괴팍하고 기괴한지 사례를 늘어놓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정상 범주와 다른 사람을 위험 인물로 여긴다. '다섯째 아이'를 보면 부모조차도 자신과 결이 다른 자식을 '괴물'처럼 여겼다. 여론은 나와 다름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인간의 심리를 적절하게 건드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적은 확률이지만 누구나 장애인으로 태어날 수 있다. 누구나 소설 속 벤처럼 남들과 조금 다른 특이한 성향의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예전부터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소설 속 배경인 20세기나 지금이나 육아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특히 아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엄마의 몫이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도 사회도 벤에 대한 책임감 따위를 갖지 않으려 했다. 학교나 기관은 아이가 정상이라며 문제의 소지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만약 해리엇이 끝까지 남편의 말을 따랐다면 벤은 보호소에서 죽었을 것이다. 대신 해리엇이 꿈꾸었던 행복한 가정은 유지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해리엇은 다시 벤을 데리고 왔고, 가족들로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해리엇은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 벤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아무리 모자 관계라도 해리엇과 벤은 전혀 주파수가 맞지 않았다. 여전히 해리엇에게 벤은 괴물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해리엇이 잘한 행동이 하나 있다. 벤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를 보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불량배 또는 문제아라고 볼 수 있는 무리들에게 벤을 부탁했다. 벤은 그들을 통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웠다. 엄마의 품을 떠나 그답게 살아갈 것이다. 비록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작품이 불편했던 이유는 내가 알고 있던 정답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이질적이라 불편한 그런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 곁에 있고 앞으로도 마주칠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두려움을 준다고 해서 그들을 우리 시야에서 치워 버리는 것이 과연 정의롭고 괜찮은 사회일까? 부끄럽게도 16년 동안 교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저 학생만 우리 반에 없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 제법 된다. 벤과 같이 문제 성향을 타고난 아이를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것, 교육이란 참 어려운 것이다. 


 내가 교사가 아니었다면 이 소설을 읽으며 내 아이는 정상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문제 성향이 다분한 어려운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힘든 입장을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년 벤과 같은 아이들을 학교에서 만난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에 문제 성향이 있는 학생을 바른 방향으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들을 어느 정도 방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선량한 다수를 위해 학교가 요구하는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그를 제도권 교육에서 격리시키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악마처럼 보이던 아이들이 졸업 후 멋지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잘 성장한 케이스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벤 역시 남들과 약간 다른 정도의 특이함을 지니고 있던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을까? '다섯째 아이'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들어 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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