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자존감은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길러졌습니다. 보글보글과 원더보이 몬스터 랜드, 파이널 파이트 등의 게임에서 원 코인 끝판왕의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100원 동전을 넣고 게임을 시작하면 동네 아이들이 제 주변으로 몰려왔습니다. 한 번도 죽지 않고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가는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저는 동네 오락실에서 인싸로 통했고, 오락실 입장 순간부터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제 동생도 게임을 잘 하는 형을 자랑스러워하며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사실 게임을 잘 하게 된 것에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다른 동네 오락실에 원정을 다녔죠. 그곳에서 원 코인 끝판왕을 해내는 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메모장을 꺼내 어디에 어떤 아이템이 있는지, 각 스테이지 보스 공략법 등을 적고는 했습니다. 원정에서 선진 문물을 충분히 접한 저는 우리 동네로 돌아와 영웅이 되었죠. 마치 저 스스로 깨우친 것처럼 연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혼자서 컴퓨터를 상대하는 게임에 지겨움을 느꼈습니다.
그 시점에 엄청난 게임이 제 인생에 등장합니다. 그 게임의 제목은 'The King of Fighters'였습니다. 더 킹 오브 파이터즈를 줄여서 '킹오파'라고 칭하겠습니다. 킹오파는 당시 유명한 대전 게임이었던 '용호의 권', '아랑 전설'과 마루치, 아라치로 유명한 '사이코 솔저' 속 캐릭터들이 총망라된 게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추가된 매력적인 주인공 팀도 있었고요. 한 게임 안에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흥분감 속에 게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95년도부터는 팀을 직접 편집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습니다. 용호의 권의 '류'와 아랑 전설의 '테리', 킹오파의 주인공인 '쿄'까지 한 팀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당시 저에게는 이 팀이 어벤저스였습니다. 등하교때마다 부모님 눈을 피해 오락실에 들렀고, 열심히 고수들의 플레이를 눈으로 익혔으며, 꾸준히 게임을 한 결과 끝판왕 루갈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2주 만에 끝판왕 루갈까지 정복합니다. 이제 더 이상 공략할 스테이지가 없어진 제가 그 게임을 그만두었을까요?
https://youtu.be/greALx7jn4U
아닙니다. 이때부터 상대방과의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명 '연결'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게임을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도전 신청을 하는 것입니다. 중학생이 되자 동네 오락실이 아닌 학교 근처 오락실로 무대를 옮겼습니다. 하교 시간에 많은 인파가 오락실로 몰리기 때문이죠. 컴퓨터가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훨씬 더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게임 유저들에게 도전을 하고 그들로부터 도전을 받는 일 또한 저를 설레게 했죠. 무엇보다 제 캐릭터 에너지 칸 위에 있는 'BEAT BY'라는 문구가 매혹적이었습니다. 소싯적 때 'BEAT BY 13'까지 찍어 보았습니다. 13명의 상대와 겨뤄 연속으로 이겼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레버를 잡았었죠.
한편 더 이상 도전자들이 없으면 남은 스테이지를 정복하면 됩니다. 그리고 끝판왕까지 잡고 나면 엔딩 화면이 뜹니다. 엔딩 화면은 사실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수없이 봤던 화면이니깐요. 하지만 저는 엔딩 화면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저의 스코어 옆에 제 이니셜인 'P.H.J.'를 새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목표는 그 게임의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P.H.J'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저의 오락실 인생은 중학교 3학년 때 한 번만 더 오락실에 갈 경우 자퇴시키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으로 끝이 납니다. 3년 뒤 수능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야 다시 오락실에 방문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킹오파 98 시리즈로 다시 한번 동네 오락실의 정상에 오릅니다.
https://youtu.be/ttkg7iUJBnU
게임을 지속할 수 있던 힘은 피드백에 있다
제가 그토록 게임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다른 사람과의 승부에서 이기고 싶어서였을까요? 물론 게임이든 스포츠든 규칙이 있는 경기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해 상대를 이긴다는 것은 상당한 쾌감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그 쾌감을 얻기 위해 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등교 전에 오락실에 들러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죠. 지겨움을 느끼지 않고 매일 꾸준히 게임을 할 수 있던 힘은 피드백에 있었습니다. 게임은 공부와 달리 매일 저의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엉뚱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모든 학생들의 머리 위에 레벨이 있는 것입니다. 레벨이 1000에 도달하게 되면 수능 만점을 받을 수 있는 실력임이 인증됩니다. 물론 중학교 때의 공부량으로 인해 모든 고등학생의 레벨이 동일하게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공부한 양만큼 레벨이 상승하기도 하고 하락하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공부만 생각하며, 제대로 된 방법으로 영리하게 공부를 한 학생은 한꺼번에 레벨이 10씩 오르기도 합니다. 손흥민 경기를 보기 위해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어 공부 집중력이 떨어지는 학생의 경우 레벨이 2 정도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의 레벨뿐만 아니라 같은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친구들의 레벨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소 끔찍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공부에 대한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요?
공부라는 것이 힘든 이유가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취업도 마찬가지죠. 회사는 친절하게 내가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면 누구나 원하는 기업에 입사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세상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지 않고 충분한 피드백도 해주지 않습니다.
반면에 게임은 명확합니다.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적용합니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출발선이 달라지는 세상과 달리 게임은 모두가 공평한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할 수 없도록 다양한 장애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장애물은 게임 창작자가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고, 함께 게임에 참여하는 다른 유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게임에서 장애물과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임의 결과는 측정이 가능합니다. 유의미한 숫자로 현재 위치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목표 달성 후에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게임의 시스템을 우리 삶에 적용한다면
우리의 삶과 달리 게임은 명확한 피드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그 피드백이 게임 중독에 빠뜨리고 게임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만약 구체적인 피드백이 없다면, 밤새우며 PC방에서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롤플레잉 게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디아블로'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밤을 새우며 게임을 했음에도 그다음 날 정액 시간이 끝나 집으로 가야함을 아쉬워했습니다. 롤플레잉 게임 속 캐릭터의 성장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게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게임 속 캐릭터의 성장에 대한 욕구도 무한하듯이 실제 현실 세계에서 우리들의 성장 욕구 또한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게임의 피드백이라는 요소를 삶에 적용해 성장을 도모하면 어떨까 하는 조언을 하고자 합니다. 즉각적이며 반복되며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성장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죠. 내가 목표로 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많은 것들에 게임적인 요소를 가미시키는 것입니다.
집에서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라는 집안일은 저의 몫입니다. 좋아하는 팟캐스트나 유튜브 강연을 들으며 설거지하는 시간을 저는 꽤 좋아합니다만 설거지도 게임이 될 수 있을까요? 설거지에도 보상이나 피드백적 요소를 넣으면 됩니다. 설거지 후 그릇이나 접시 등을 일정한 기준으로 분석해 피드백을 주는 것입니다. 그날의 설거지 결과물에 대한 점수를 확인할 수 있고요, 그 점수는 한 달 또는 일 년 동안 누적이 됩니다. 심지어 옆집 남자와 누가 더 깨끗하고 효율적으로 설거지를 하는지 경쟁도 할 수 있고요. 전 세계 1등의 실력을 지닌 설거지 전문가와 실력을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특정 순위에 들어가면 랜덤으로 선물도 주어집니다. 이 정도면 재미있게 설거지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삼성헬스 앱 캡처
실제로 이런 요소들을 구현한 앱이 많습니다. 제가 올해 즐겨 사용하고 있는 삼성 헬스 어플도 게임적 요소가 다분합니다. 삼성 헬스 어플에서는 매일 저의 걸음 수를 알려줍니다. 심지어 걷기 친구끼리 겨루기도 가능합니다. 세 줄 일기 어플에서 같이 일기를 쓰고 있는 파란 웃음 님과 현재 7만 보 걷기 게임 중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퇴근 후 침대에 누워 데굴데굴을 시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파란웃음 님이 저를 앞지르면 괜한 경쟁심에 운동화 끈을 동여매게 됩니다. 보상이라고는 '도전에서 이겼습니다. 잘했어요!'라는 기계의 한 마디지만, 매일 저의 걸음걸이를 피드백해 준다는 측면에서 이 앱은 게임적 요소를 잘 도입했습니다.
삼성헬스 앱 캡처
심지어 이 앱은 앱을 사용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 중 저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왕관을 쓰고 제일 앞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분이 1등입니다. 영어 스펠링인 것을 봐서는 외국 분이더라고요. 저는 9월 동안 315,337보를 걸었고 97,174위에 랭크되어 있습니다. 기분 좋게 상위 27프로에 속해 있네요.
포겟미낫 앱 캡처
포겟미낫 앱 캡처
요즘은 영어 단어 공부도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 중학생일 때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매일 한 쪽씩 영어 단어 빡빡이를 시켰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했던 저에게 그 행위는 그냥 노가다였죠. 한 마디로 재미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앱으로 영어 공부를 하면 꽤 재미있고 몰입까지 하게 됩니다. 이 앱 역시 게임의 피드백이란 특징을 잘 구현해 놓았습니다. 한 문제씩 답을 맞힐 때마다 시각적, 청각적 요소로 정답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화면을 클릭하는 손맛도 있고요, 매번 기록을 누적으로 저장해 둡니다. 실력이 향상되면 칭찬해 주기도 하고요. 틀린 문제는 하나의 스테이지가 끝난 후 다양한 방식으로 복습을 시켜줍니다. 이렇게 즉각적인 피드백은 하기 싫은 공부도 즐겁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 나쁜 피드백도 있습니다. 올해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는 믿음으로 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건강과 몸무게는 저의 생활 습관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를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다 보니 체중도 많이 줄더라고요. 작년보다 9킬로 감량에 성공했습니다. 목표가 7킬로 감량이었는데 이미 초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올여름 공단 검진을 받았는데요, 내심 체중이 정상으로 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죠. 9킬로나 감량했음에도 저는 여전히 비만이었습니다. 과체중까지도 도달하지 못했음을 확인한 저는 다어어트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았습니다. 물론 매일 20분 체조, 스쿼트 50개, 만 보 이상 걷기, 30분 달리기는 루틴처럼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만 식습관은 다시 작년으로 되돌아갔죠. 저의 몸무게는 두 달 동안 정체 상태입니다. 제가 정상 체중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몸무게에서 7킬로나 추가로 더 빼야 합니다. BMI 계산은 저에게 전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피드백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시 다이어트 욕구를 되살리기 위해 적절한 보상과 피드백 시스템을 스스로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블로그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주 화요일 퇴근 후 밤 11시 30분까지 두 편의 글을 썼습니다. 그날 완성한 글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코로나 아홉수'와 '국채/금융 문맹 탈출 90일 프로젝트'입니다. 만약 글쓰기가 일이었다면 절대 완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블로그 글쓰기 역시 적절한 피드백이 있기에 지속적으로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열심히 글을 썼는데 아무 피드백이 없다면 글쓰기에 대한 흥미와 보람을 잃게 되겠죠. 제 글을 읽고 공감과 댓글을 달아주는 이웃들의 존재로 오늘 저녁도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습니다. 똘똘한 온달 님과 함께 하는 글쓰기 모임에서 온달 님이 해주는 구체적인 피드백 역시 저에게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줍니다.
또한 금융 문맹 탈출 90일 프로젝트 경제 용어 글쓰기의 경우도 이웃의 존재가 있기에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웃 중 '쉼' 님께서 매번 잘 보고 있다는 격려의 댓글을 달아주십니다. 오늘은 경제용어 포스팅 하루 쉴까 하다가도 혹시 쉼 님처럼 제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로 다시 컴퓨터 앞에 앉게 됩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게임의 피드백 시스템 속에 성장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게임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본인의 삶에 적절하게 적용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피드백의 강도와 빈도는 본인의 성향에 맞게 조절하면 되고요. 앱이라는 시스템을 활용해도 좋고, 스스로 보상 시스템을 만들어도 됩니다. 학창 시절 저는 수학 과목을 좋아했습니다. 며칠을 끙끙대며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의 기쁨과 성취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극악의 난이도였던 94 수능 수학 문제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다 풀었을 때는 그 자체가 저에게 충분한 보상이었습니다. 노래 듣는 것을 좋아했던 저는 55분을 집중해서 공부하면 5분의 음악 감상 시간이라는 보상을 저에게 주는 시스템을 활용했습니다.
인간은 피드백을 받아야만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미션을 수행하듯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수행해 나가고, 수행의 끝에는 스스로에게 보상을 해줌으로써 지속적이고 자발적으로 성장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또한 피드백을 통한 습관 형성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하루에 만 보 이상 걸어야지 하기보다는 만 보 이상 걸음으로써 5킬로그램 감량에 성공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쓰고 있는 습관 어플에는 총 16개의 미션이 있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모든 미션이 사라진 창을 봅니다. (미션을 수행한 후 미션을 클릭하면 화면에서 사라지도록 설정을 해두었습니다.) 사라진 창을 보며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도 나답게 즐겁게 신나게 정말 잘 살았어. 너무 잘했고 칭찬해."라고 격하게 셀프 칭찬을 해줍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하는 칭찬이 저에게는 최고의 보상이자 피드백입니다. 여러분들도 게임 속 피드백 시스템의 원리를 생활에 잘 접목시켜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찾을 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