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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천소년 Jul 05. 2021

문제아는 영원히 구제 불능일까

주홍글자, 너새니얼 호손

 어제는 이번 달 색종이 독서 모임으로 선정된 '주홍글자'라는 책을 하루종일 읽었습니다. 미국 소설의 원조로 평가받는 너새니엘 호손의 작품으로 100년도 넘은 소설이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는 고전 작품입니다. 사실 독서 모임 책이 아니었다면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잘 읽히지 않았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인 헤스터는 간통을 해 사생아를 낳았다는 죄목으로 처형대 위에서 몇 시간 동안 공개적으로 대중의 모욕을 받습니다. 소설 배경에 해당하는 17세기 미국은 청교도가 지배했던 사회로 인간의 욕망보다는 종교에서 내세우는 계율을 엄격하게 중시했던 시대였습니다. 다른 여성을 마음속으로 탐하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했을 만큼 인간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던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의 불륜은 사형을 구형당할 만큼의 큰 죄였습니다. 다행히 그녀의 남편이 오랜 시간 나타나지 않아 죽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정상참작 되어 사형은 면하게 된 것이지요.

 사형 대신 그녀는 평생 동안 간음을 뜻하는 'A' 글자가 새겨진 천을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죗값으로 마땅히 평생 동안 사람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받아야 한다고 당시 지도층은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헤스터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해도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고맙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아니라 '너같은 것이 감히'라는 느낌의 차가운 시선과 비웃음뿐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주홍글자'는 세상의 낙인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주홍글자가 새겨진 헤스터를 비웃고 멸시하며 사람들은 안심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고, 그녀와는 다른 부류에 속해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더욱 가멸차게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질서와 규칙에 대한 의문

 헤스터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와 규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홍글자를 평생 신체에 달고 다니는 낙인이라는 벌을 받게 되었죠. 물론 간통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하지만 헤스터의 행동이 평생을 낙인 찍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할 만큼 나쁜 행동이었을까요? 금방 보스턴으로 따라가겠다는 그녀의 남편은 2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딤스데일 목사에게 끌림을 느꼈고,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인생에 있어 큰 기쁨은 매력적인 사람을 알고 그(그녀)와 교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력에 끌려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이성이었던 것이고, 성적인 매력까지 동시에 느끼게 된 것이지요.


 다만 청교도 사회였던 17세기에 헤스터의 간음 행위는 사회의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중대한 범죄였을 것입니다. 종교가 지배했던 당시 청교도 지배층은 그녀를 쉽게 용서할 수 없었습니디. 헤스터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 주홍글자라는 낙인은 사회와 조직의 룰을 정하는 강자의 입장에서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사회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학교에서도 교칙을 내세워 학생들이 공동체의 규칙을 순종적으로 따르는 태도를 가르칩니다. 민주 시민을 양성한다는 목적으로요. 그런데 사회 지도층이 만든 세상의 규칙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요. 노예제 사회에서 주인이 노예를 죽여도 사회 질서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노예이기 이전에 사람인 그들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것이 당연한 그 사회의 질서였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로 한번 낙인이 찍히면 가차없이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당대 사회를 지배했던 규율과 인습은 너무도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를까요?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이 다수의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생산 결과물 대부분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거기에 반기를 든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이단아가 되어 처단을 당하겠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주홍글자

 주홍글자를 읽으며 제가 만났던 학생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학교와 교사의 틀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해 학생들에게 주홍글자를 부여하지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새 학기를 준비하는 2~3월에 전년도 담임 교사로부터 학생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학교에서 문제아로 불리는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지요. 미리 정보를 입수하는 것에 대한 장점도 있지만 학생을 실제로 만나고 겪기도 전에 이미 해당 학생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을 갖게 되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전에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정보를 접수하는 것을 지양했습니다. (물론 굳이 나에게 학생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다가오는 분들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먼저 사전에 학생에 대한 정보를 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편견 없이 대하고 낙인찍지 않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우리는 누구나 자기와 생경하게 다른 것에 대해 반감을 같습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괴상망측한 외계인을 만나게 되면 보통 주인공들은 고함을 지릅니다. 나와 다름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이지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다른 삶을 살아왔고,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다면, 상대가 학생이라도 일단 거부감이 듭니다. 게다가 저는 평균적으로 모범생에 가까웠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랐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의 틀에서 보았을 때 어긋난 행동을 하는 학생을 보면 본능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다보니 학생과 상담을 하면 할수록 더 답답해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특히 제가 생각했을 때 당연한 상식을 학생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할 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 설명을 하며 때로는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벌을 주거나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20대 새파랗게 짊었던 시절에는 몽둥이도 자주 들었습니다.

 20대 때는 지금보다 더욱 열정적이었습니다. 연락 없이 결석을 하는 학생은 공강 시간에 집까지 쫓아가서 학생을 학교로 데려오고는 했죠. 퇴근 후나 주말에도 한 번씩 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밥은 먹었는지, 가정과 학교에서의 생활에 어려움이나 고민은 없는지 물어 보고는 했습니다. 심지어 시험 전 날에는 모든 반 학생들에게 지금 공부하고 있는지 확인 전화를 돌렸지요. 소위 말하는 문제아라고 불리는 학생들에게는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나라는 사람과의 만남으로 지금까지 문제아라고 낙인찍힌 학생을 개도할 수 있다고 자신했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제 마음을 알아줄 거라 자신했습니다.

 문제는 어느새 저의 노력에 대한 보상 심리 및 기대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애쓰는데 왜 너는 그대로이고 변하지 않지.'라는 생각이 제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죠.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는 학교 시험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오랜 제 좌우명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연말이 다가와도 저의 뜻대로 변하지 않는 학생을 포기했습니다. 저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그냥 관심을 꺼버린 것이죠. 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여전히 자기 멋대로 하는 그 학생이 밉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너는 구제불능이라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도 부적응자로 살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거의 저주에 가깝네요. 부끄럽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 학생을 우연히 백화점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백화점 내에 있는 신발 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고요. 우렁찬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 ○○○ 매장입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손님?"이라고 한 점원이 저에게 말을 거는데 바로 그 학생이었습니다. 워낙 저의 속을 많이 긁은 학생이고 오랜 시간 서로 으르렁거렸던 관계였기 때문에 바로 서로를 알아보았죠. 그 학생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밝아 보였습니다. 쾌활한 목소리로 저에게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결혼은 하셨는지 등에 대해 물어보는데 예전에 그 학생을 미워했던 순간들이 생각나서 부끄러웠습니다. 본인은 대학 공부는 적성에 안 맞아서 진작에 때려치우고, 백화점에서 점원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하루 종일 서 있어서 힘들기는 하지만 본인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어 좋고, 언젠가 본인이 좋아하는 액세서리 가게를 차리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을 모아야 한다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가 그동안 많이 어른스러워졌음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그 학생이 가진 이런 모습이 눈에 안 들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제 눈에는 수업 시간에 늘 엎드려 있고, 교복을 챙겨 입지 않으며, 항상 늦게 등교하는 학생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학교와 교사의 틀 안에서 그 학생을 재단해 았던 것이죠. 어쩌면 그 학생은 내가 알고 있던 모습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함부로 누군가를 낙인 찍는 것을 경계해야

 제자의 추천을 받아 운동화를 구입한 후 집으로 가는 길에 함부로 사람에게 낙인이란 잣대를 들이대면 안되겠다는 깨달음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언젠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것이라는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그 학생을 지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저의 오만함도 반성했고요.

 사실 제가 만나는 고등학생들은 이미 꽤 오랜 삶을 살았습니다. 16년 이상 가족과 친구 그리고 각자의 세상을 접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온 그들을 고작 만난 지 몇 개월 되는 담임교사 주제에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저는 정말 교만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좀 더 겸손한 태도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나쁜 아이라고 낙인을 찍기 전에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학교 다닐 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교칙들도 지금은 많이 바뀌었거든요. 제가 학생 시절에는 교무실 책상마다 선생님들 재떨이가 있었습니다. 그 재떨이를 비우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었고요. 만약 당시에 학생이 교무실 청소와 선생님들 재떨이까지 비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면 제대로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학생이라는 틀 안에서 규제하는 교칙들이 꽤 많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학생의 모습과 자연적인 본능에 따른 욕구 충족 사이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문제아들은 개인의 본능과 자유에 충실한 아이들이지요. 학교는 검증된 이데올로기를 가르치는 기관으로서 사회 질서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를 누리려는 학생들을 통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학교와 교사가 원하는 틀에 학생들을 맞추고, 그 틀에 맞추지 못한 아이를 문제아, 구제불능이라고 낙인찍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는 학교의 현재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보다는, 그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조금은 더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사로서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더 키울 수 있었습니다.   

 헤스터가 살았던 시대 역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은 꽉 막혔던 곳입니다. 또한 남자의 권위가 월등히 강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유교 중심의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똑같이 남녀가 불륜을 저질렀더라도 여성에게 주어지는 비난의 강도가 훨씬 더 강했습니다. 실제로 조선 성종 때 10명이 넘는 남성과 관계를 맺었던 양반집 규수였던 '어우동'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어우동의 남편이 먼저 외도를 했고 오랜 세월 아내를 투명인간 취급했음에도 말입니다. 심지어 그녀와 간통했던 남자들 대부분은 사형은커녕 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성이 먼저 꼬리를 쳤다는 프레임으로 무죄로 풀려난 남자들도 있었죠. 과연 어우동의 죄가 사형을 당할 만큼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잘못의 정도는 시대에 따른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 아닐까요? 누군가를 비난하고 낙인을 찍기 전에 지금 당연하다고 판단되는 그 잣대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럼 소설 속 주인공인 헤스터는 주홍글자 'A'라는 낙인이 찍힌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설은 헤스터가 어떻게 해서 간통을 하게 되었고, 아이까지 낳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일절 없습니다. 다만 헤스터가 벌을 받게 된 이후에 주목할 뿐입니다. 그녀는 세상이 부여한 낙인으로 핍박을 받으면서도 최선을 다해 펄을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낙인을 부여한 곳에서 먼곳으로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그 마을에 계속해서 살면서 세간 사람들의 혹독한 대우를 치러 냈습니다. 또한 가진 것이 적더라도 자신의 것을 기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마을에서 불행한 일이 발생하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도와주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전혀 대가를 바라지 않고요. 

 그녀에게 벌로 부과된 주홍글자 A는 원래 간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A를 본래의 뜻대로 해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놀라울 만큼 헌신적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그녀에게 감명받은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에 있는 A의 뜻을 유능하다는 뜻의 'able'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고 감사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겸손함을 잃지 않기 위해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며 인사를 받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소설의 끝에는 그녀의 간통과 연관된 모든 남자들이 죽게 됩니다. 자신의 죄 앞에서 당당하게 맞서 싸운 헤스터만이 살아남아 그녀의 딸인 펄과 함께 유럽으로 떠납니다. 유럽에서 펄을 키운 이후 헤스터는 다시 자신에게 낙인을 찍은 그 마을로 돌아와 여생을 보냅니다. 되돌아온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슴에 'A'라는 글자를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들을 위로하고 조언해 줍니다. 헤스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죄와 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 용어로 표현하면 '멘토' 또는 '인플루언서'가 된 것이죠.

 청교도 통치자들은 그녀에게 평생 'A'자를 가슴에 달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시간이 흘러 대중들은 'A'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헤스터는 자신에게 주어진 낙인인 주홍글자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들을 옭아매는 주홍글자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주홍글자의 굴레를 이겨내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장 저의 관점에서 예의가 없고 기본이 안 되어 있는 학생이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결혼 전처럼 방과 후에 늦게까지 남아서 상담을 하거나 퇴근 이후에 학생들에게 연락하는 행동을 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대신 끊임없이 학생들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의 작은 최선으로 그들을 대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진심과 친절한 태도로 아이들을 지도할 것입니다. 


 때로는 학생이 저의 문자를 씹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문자에 성의 있게 답장을 해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학생이 저의 문자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가르쳐줘야죠. 상대의 연락에 늦게라도 답을 하는 것이 예의라고요.) 화를 내는데 에너지를 쓰면 그만큼 학생 지도를 못 하거든요. 비록 아무런 피드백과 반응이 없더라도 지속적인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문자 한 통이 1년 뒤,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에 그 학생이 좀 더 나은 학생으로 성장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10년 넘게 교직에 있으면 깨닫게 된 신념이 있습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교사라면 두 가지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기에 교육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보아야 예쁩니다. 자꾸 보면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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