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천소년 May 24. 2022

'욱'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고쳐야 할 단점이다

© egla, 출처 Unsplash


어제는 최근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 처형 집에 방문했습니다. 천안에서 용인까지 1시간 정도 운전을 했지요. 고속도로 ic를 통과해 용인 시내로 들어가던 길이었습니다. 오른쪽 길로 빠지기 위해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변경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한참 뒤에 있던 차가 빵빵거리며 더욱 속도를 내며 달려오는 것입니다. 자칫하다가 두 차가 부딪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차선 변경을 못했습니다. 그 차는 빠른 속도로 제 옆을 지나갔지요. 그 순간 저는 욱했습니다. 나였으면 그 정도 거리에서는 차선 변경을 시도하는 차를 먼저 보내 주었을 텐데 사소한 배려를 하지 않는 그 차의 운전자가 야속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속도를 내며 그 차를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아내가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오빠, 혹시 아까 그 차가 클랙슨 울린 거 마음에 담고 있는 거 아니지?" 그 질문을 듣고 난 후에 바로 이성을 찾은 저는 안전하게 처형 집까지 운전을 해서 갔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다혈질이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대부분 제 지인들은 저의 성향을 모릅니다. 제가 다혈질인 것을 확인하려면 가족이나 연인이 되어야 볼 수 있으니깐요.) 원래 그런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한번씩 욱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지요. 그러고 보니 금요일 기차 안에서도 저는 욱을 했네요. 한 젊은 청년이 기차 안에서 욕을 섞어 가며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저를 비롯해 대부분 승객들은 불편해했고요. 같은 라인에 앉았던 저는 일부러 그 청년을 대놓고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왜 쳐다보느냐?"라고 물으면 "기차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사람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요."라고 답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통화를 마무리한 후 바로 이어폰을 귀에 착용하더군요.


스스로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자면 저는 잘 참는 성격에 속합니다. 그렇게 감정의 그릇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길길이 날 뛸 때 저 혼자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한 적도 많습니다. 지인이 길거리 행인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폭력 없이 상황을 수습한 적도 있고요. 직장 선배들에게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냉정하고 차분해서 부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제어가 안 될 정도로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한 번씩 저의 상식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는 타인을 보면 화가 납니다. 나는 운전할 때 양보를 하며 안전 운전을 하는데 절대 다른 차에 양보하지 않으며 난폭하게 운전하는 타인을 보면 화가 나고, 나는 공공장소에서 통화를 자제하거나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특히 흡연을 해서는 안 되는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나 길거리에서 큰 소리를 내며 가래를 내뱉는 사람을 보면 분노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끓어 오릅니다. 예전 아파트에서 상습적으로 벤치에서 담배 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벤치에 버젓이 '금연'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는데도 대놓고 담배를 피고 동시에 침도 뱉더라고요. 그 청년이 몇 동 몇 호에 사는 지를 확인한 저는 그가 버리고 간 담배꽁초를 주어 그 집 대문 앞에 가져다 놓은 적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그 어떤 행동에도 너그럽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 넓은 교사이지만 실내에서 침을 뱉는 행위만큼은 저도 모르게 눈이 돌아갑니다. (심지어 저는 저한테 욕을 하는 학생에게도 웃으면서 "진정해라. 그렇게 화내면 결국 네가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 탓을 하면 안 되지만 정글과도 같은 직장에서 오랜 기간을 근무하며 한 번씩 욱을 해야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예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눈빛이 변하면서 큰 소리로 상대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지르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의 눈빛이 돌변하는 순간 모두가 그의 말에 수긍했지요. 그가 하는 말이 옳거나 정당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욱하는 그의 성격이 무섭기도 하고 더럽기도 해서였겠죠. 어쩌면 그는 자신이 화를 냈을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동료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짜릿한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쾌감을 한 번 경험한 그는 주기적으로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며 즐거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즐겼을 것이라는 저의 말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가 다혈질인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겠죠. 또한 나는 잘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잘못 행동하기에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욱'을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저 역시 그의 행동을 보며 한 번씩 욱을 해야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물론 제 나름대로 저보다 후배이거나 나이가 어린 분께는 욱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지키고 있습니다만, 점점 직장에서 상사에게 욱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럼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나의 '욱'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또한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욱'을 표현한 것은 괜찮을까요? 아버지가 되고 난 후에 어떤 상황에서도 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최근에 아들이 본인 뜻대로 안 될 때마다 큰 소리로 괴성을 지르거든요. 아들이 그 행동을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뭔가 상황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버럭했던 아버지인 저를 보고 배웠겠지요. 게다가 저는 직업이 교사입니다. 10대 아이들도 나쁜 것은 금방 보고 배웁니다. 아이들 역시 12년 동안 부정적 상황에서 선생님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고 간접적으로 배웠겠지요. 부정적 상황에서 혼잣말로 욕을 하거나, 벽을 때린다거나, 큰 소리로 상대를 위협하며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는 행위는 모두 어른들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했지만, 여전히 저는 저도 모르게 매너 없는 운전자를 보며 인상을 찡그리거나 난폭하게 보복 운전을 하려고 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의 표정과 행동을 뒤에서 아이가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서요.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지만 어떤 사유든 간에 '욱'을 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민폐인 행위입니다. 내가 다혈질이라 가끔 욱한다는 말은 자랑스럽게가 아닌 부끄러워하면서 해야 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욱'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손해입니다. 감정은 곧 에너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루에 자신이 쓸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갖고 살아갑니다. 자주 만나거나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화가 났을 때는 간단히 모른 척하며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지요. 상대와 대화를 통해 왜 화가 났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서로 맞춰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진심을 다해 상의를 해야 합니다. 그 또는 그녀는 내 삶에 소중한 사람이니깐요.


하지만 내 인생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타인에게 굳이 나의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너 없이 클랙슨을 울리며 내 옆을 지나가는 차주와 기차 안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던 청년, 그리고 금연 구역에서 매일 담배를 피던 청년에게 제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행동은 잘못 되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역무원이나 아파트 경비원께 그들을 제지해 달라고 부탁을 드릴 수는 있겠지요. 굳이 제가 그 행동에 분노하며 식식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소중한 사람이 제 곁에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요.


왜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의 행동에 그렇게 감정을 과도하게 소모했을까요? 이제는 누군가 불손한 행동으로 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더라도 그가 저에게 중요한 사람인가를 떠올려 볼까 합니다. 동시에 과연 제 자신은 누구를 탓하기만 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인간인지에 대해서도 반성할까 합니다. 운전 중 매너 없이 운전하는 타인에게 분노하는 제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조용히 한 마디 했습니다. 오빠도 운전하면서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요. 그 순간 저는 화를 내며 다르다고 항변했습니다. 나의 행동에는 고의성이 없었고 실수였을 뿐이라고 변명했지요. 그러자 아내는 방금 깜빡이 없이 갑자기 끼어든 차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반박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 역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수많은 타인들에게 불편함과 불쾌감을 주며 살아가던 사람이더라고요.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침을 뱉는 사람도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는 세상에 이익이 되는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겸손해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늘 옳고 너는 잘못되었다는 오만한 생각이 저의 잦은 '욱'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욱'하는 성격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자랑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저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을사조약처럼 나라를 빼앗긴다거나 또는 타국에 침략을 받았다거나, 위정자가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거나, 나의 가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욱'해야겠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눈이 뒤집힐 만큼 분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화'라는 감정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화'를 내고 '욱'하는 포인트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욱'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 되겠지요? 화가 날 때 어느 정도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 가서 스스로를 '다혈질에 한 번씩 욱하지만 뒤끝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미성숙한 어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니깐요. 지금까지 자주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영천소년의 고백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몸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