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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n 01. 2021

쓰지 못하는 글, 읽지 못하는 책



복직을 하고나서 한동안 조직개편이다 뭐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1월을 맞아 신규 조직으로 발령이 났고, 백억대 규모의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사업 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말은 사업 관리지만 계약에 필요한 행정업무를 챙긴다. 아직은 프로젝트에 깊게 관여할 만큼 이해도가 높지 않을 뿐더러, 문과 출신인 내게 기지국 구축과 같은 네트워크에 기반한 업무는 무엇을 알고 한다기 보다 그저 주어진 것을 해내는 것이 우선이다. 9 반부터 3 반까지, 남들보다 3시간 적은 근무 시간이지만 그래도  시간 안에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보이고도 싶어 눈치 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닌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내 머리 속에 큰 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 외에, 나의 생존을 위해 먹고 마시고 운동하는 것말고는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책을 읽다가도 불현듯 생각난 회사 일에 흐름을 놓치고(버지니아 울프는 이걸 ‘나의 작은 물고기가 달아나버렸다.’라고 했다.), 글을 쓰고 싶어서 펜을 들었는데 머릿속의 생각을 표현할 정확한 언어를 찾지 못해서 무엇을 쓰더라도 그저 겉도는 느낌이다. 그렇게 한달이 넘게 쓰지 못했다. 왜 쓰지 못할까, 나는 왜 쓰지 못할까, 나는 왜 쓰지 못한다고 힘들어할까, 작가도 아닌 주제에 글을 못 쓴다고 힘들어하는 게 웃긴다며, 혼자서 생각한다. 그렇게 쓰지 못하고 읽지 못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어떻게 다행히 하루가 지냈다며 안도한다. 안도하는 하루로 족하는 요즘이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하면서 허한 기분에 새벽에 일어나 몇 글자 적고 몇 글자를 읽는다.


<그래도 띄엄뜨엄 읽는 책 중에서>


“자기 자신에게 늘 진실하라.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의 모조품이 되지마라. (중략) 눈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발자국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에게 언제나 진실한 것은 얼마나 치열한 자기와의 씨름인가. p.20


우리 대부분은 ‘화려한 이름’에 집착하는 순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진정성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외적으로 화려한 이름이 니라 타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함께함의 세계를 갈망하고, 가꾸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 사실은 이렇게 이름없는 들꽃과 같은 이들이 우리의 세상을 밝혀주는 이들이 아닌가. 들꽃같은 사람들의 존재가 우리 삶의 유한성과 공허성, 그리고 지독한 문제와 딜레마를 넘어서게 하는 가느다란 햇살을 비추어주는 것이리라. p.57


나에게 ‘쓰기’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 ‘’쓰기’를 하지 못하는 날이면 깊은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쓰기를 하는 것, 내게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끊임없이 창출하고, 발명하고, 만들어가기 위한 씨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 또한 다른 동료 인간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소통에의 열정이다. p.63


도로테 죌레의 <빵만으로의 죽음>이라는 책 제목이 암시하듯, 종교/철학 등 여타의 인문학적 갈망은 인간에게 빵과 밥이라는 물질적 조건만으로 인간이 지닌 존재론적 갈망과 배고픔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물적 조건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것을 경시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에게 생존을 위한 구체적인 물적 조건이 모두 채워진 후에도, 사유하는 인간이라면 그 물저 조건 ‘너머’의 세계를 갈망하며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의 중요성을 이 개념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 <배움에 관하여> 중


최근에 사서 읽지 못한 책들을 책장  칸에 몰아놓았다. 펴보지도 못한, 읽다만 책들이 쌓이는데도 사고 싶은 책은  빠른 속도로 장바구니에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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