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꼬마 치료사들과 함께
감정에 압도되는 순간이 있다.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할 때, 감정에 불이 붙고 그 불이 더욱 거세져서 이성적 판단이 멈추는 순간. 통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내뱉는 말들과 그 상태 자체로서의 내 자신이 곁에 있는 이들에게 상처와 내흔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런 격렬한 감정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를 뒤흔드는 그 감정을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 없이, 우선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하기도 하고,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 자체를 피한다. 하지만 그 불구덩이 같은 감정 속에서 뒹구는 듯한, 몸과 마음이 타는 듯한 그 순간이 바로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나, 채워지지 못한 욕구와 안정감을 갈구하는 나를 만나는 순간말이다.
이런 감정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조절은 커녕, 거센 파도처럼 나 자신을 휩쓸어버린다. 나의 이해력을 넘어 통제가 불가능해진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게 되면 거기서부터 이젠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나는 누군지, 너는 누구고 여긴 어딘지까지도 헷갈리게 된다.
요 며칠 아이들이 잠을 쉽게 자지 못했다. 9시가 되면 불을 끄고 누워도 보고 책도 읽어보고 낮에 신체활동도 늘려보았다. 때론 화내는 것이 싫어서, 정확히 말하면 화내는 내 모습을 마주하기 싫어서 아예 아이들을 10시까지 놀게 놔두기도 했다. 이러나 저러나, 아이들은 잠에 들기 전 여전히 짜증을 냈고 특히 둘째는 세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잠들기 전 악을 쓰며 운다. (실제로 우리 둘쨰는 야경증이 있어서 지금도 새벽 1시에 일어나 1시간씩 운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읽다만 책도 읽고, 요가라도 하려고 하지만 아이들과 침실로 가면 그런 계획은 이미 불가능한 현실이 되어버린다. 재우려는 나와 잠을 자지 않으려는 아이들과의 기 싸움으로 멘탈이 나가버린다. 잠이 안 오는 것이 애들 잘못은 아니니 협박을 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어서 최대한 좋은 말로 타이르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는다. 그러면 내 안에서 이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어떻게 안 잘 수가 있지?’ 어린 아이들이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것을 모른 채 잠투정을 하는 아이들에 대한 분노. 티내지 않으려 노력해도, 이미 관자놀이를 비비며 스트레스가 가득해진 엄마 얼굴을 보는 첫째는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러면 눈치를 보는 첫째의 모습에 더 자극이 된다. 아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는 사실, 결국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란 생각에 더 화가 난다.
첫째가 먼저 잠들고 둘째가 울다 지쳐 잠이 들면 11시다. 겨우 잠든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댄다. 마음 속에서 이글이글 불이 끓어오른다. 나도 나를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순간이 혼란스럽다. 과연 나는 내가 맞는지, 이 마음 속 이글이글대는 불꽃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걸까.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이 쉬운 건 아니지. 그래 신체적 한계에 온거야.’ 라고 쉽게 정의내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 감정적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감정의 치유력>이란 책에선 자신을 압도하는 격렬한 감정 가운데에는 사실 그 상황 이면에 핵심감정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그저 트리거일 뿐이고, 어릴 적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핵심감정이 그 감정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책의 가이드 대로 <자신이 감정적이라고느꼈던 때는 언제였는가? 그때 당신의 상태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당신이 감정적이 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러한 감정적 경험의 결과는 무엇이었나?> 에 대한 부분을 글로 정리하려던 순간 어렴풋이 어릴 적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가 술에 취할 때마다 술을 먹지 말라고 엄마에게 폭언도 하고 애원을 하던 그 때. 아무리 내가 울부짖어도 이미 술에 취해 내 감정에 반응하지 않는 엄마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엄마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이 잠을 자지 않고 날 힘들게 하는 아이들에게로 고스란히 재현됐다.
당시엔 내가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엄마에게 자주 과장해서 말했다. 그래야 내 말을 들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과장해서 표현했던 행동들이 그 당시에는 적응적이었으나, 지금은 비적응적인 행동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잠들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나는 나의 고통스러움을 증폭시켜 표현했고 그 고통에 잠식되어 허우적댔다. 자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씩씩댈 것이 아니라 우선 나의 신체적 피곤함과 아이들의 상태를 인정하고 아이들을 자극하지 않은 채로 최대한 평온한 밤을 만드는 것이 나와 아이들에게도 적응행동이었을텐데.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닿지도 않는 애원을 하고, 더 많이 고통스럽고 더 많이 아프다고 말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엄마의 피를 물려 받아서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어릴적 충분한 안정감과 애정을 제공하지 못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그로부터 발현된 내 자신에 대해 깊게 깔린 부정적 정서.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를 쥐어짜며 노력했다. 내게 있어 받지 못한 것,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준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나의 욕구를 억누르며 참고 지연시키고 아이들을 우선으로 대하는 순간에는 늘 내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선택의 순간에선 아이들을 택했지만 내겐 육아가 누군가를 돌보고 기르는 일을 넘어서 일종의 ‘과업’으로 다가오는 것이 원망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을 통해 내 과거를 만나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을 때면, 어쩌면 아이들과 보내는 이 시간이 내겐 하나의 임상작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감정의 치유력>에서는 임상작업에 대해 다음과 강이 설명했다. ‘임상작업이란 세심하고 공감적인 치료자가 환자로 하여금 안전한 환경 속에서 조절되지 않는 정서를 정서적으로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재경험 하도록 이끌어 감당할 수 없는 외상적 느낌들이 환자의 감정적 상황 속에서 조절되고 통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록 섬세하지 못하고 공감적인 치료자들은 아니지만, 늘 내게 호의적이며 그들의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아이들. 어쩌다 모습이 마냥 이뻐 손등에 뽀뽀를 하면 이마도 내밀고 발바닥도 내밀고 배꼽도 내밀어서 다 뽀뽀하라고 하는 둘째. 언제나 “안아줘, 엄마. 지금은 엄마가 필요해”라며 나를 부르는 첫째. 어리고 서툴지만 이 어린 치료자들은 흘려보낼 수도 있는 지난 시간을 다시 경험하도록 나를 이끈다. 때로 어릴 적 감정 패턴이 반복되어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고 화를 내는 부정적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사랑스러움으로 나를 해체시킨다. 작은 키, 볼록 나온 배, 오동통한 손가락같은 비쥬얼로.
이런 사랑스러운 치료자들과 함께 어린 시절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 순간들을 다시 경험한다.
벗어나고 싶은 그 감정의 늪, 실은 그 감정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그리고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덜 불안해하고 좀더 여유있고 편안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느리더라도 더디더라도 조금씩, 천천히.
결코 길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내 안의 이 감정을 만나게 해줬으며, 이 감정을 마주할 용기를 준 나의 꼬마 치료사들. 솔이와 현이. 이 두 분께 깊은 감사를 보내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