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아삭, 써근써근, 부슬부슬
초록마을에서 오이고추 두팩, 상추 한봉, 가지, 오이, 토마토, 양배추를 주문했다. 오전에 주문하니 그 날 오후 3시 쯤 현관문 앞에 와있다. 몇 주 전 꼬리뼈를 다쳐 1주일 간 움직이지 못했다. 먹는 것도 부실하고 먹어도 속이 더부룩했다. 통증이 나아진 김에 먹고 싶은 것들을 만들려고 아직 성치않은 몸이지만 이리저리 무리를 해본다. 그렇게 해서라도 속을 채워야 왠지 다 빨리 나을 것 같다.
짙은 보랏빛에 윤기가 좔좔 흐르는 기다란 가지는 가시가 박힌 꼭지를 조심히 떼고 물로 씻는다 길게 자르고 탁. 탁. 두 번 칼질. 삼등분을 한다. 찜기에 올린 물이 끓어오르면 가지의 껍질부분이 아래로 가도록 놓고 3분 정도 뚜껑을 닫아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연두스름한 가지 속살 위로 몽글몽글 그 속에서 나온 물방울들이 맺힌다. 가지를 검지로 꾸욱 누르면 손가락 모양대로 쏙 들어가는 게 귀엽다.
찐 가지를 후후 거리며 한 김 식혔다가 두어번 찢는다. 칼로 다 자른다음 시작해도 되지만 왠지 손으로 찢은 가지에 양념이 더 잘 밸 것 같다. 손끝이 뜨거워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아도 꾸욱 참고 찢는다. 그렇게 찢다보면 가지에서 아지렁이처럼 올라오는 김이 코끝에 닿아 따뜻해지고, 포슬포슬한 가지 속살에서 나는 냄새가 참 좋다. 냄새에 가식이 없이 날 것의 냄새다. 참다 참다 결국 가지를 입으로 가져간다. 양념은 하지 않았어도 촉촉하게 씹히는 식감과 특유의 단내가 식욕을 돋운다. 코스 요리 시작 전 에피타이저 먹는 기분이다.
다 찢은 가지는 속에 물기를 살짝 짠 후 볼에 넣어 국간장, 참기름, 마늘, 소금을 넣어 살살 무친다. 찐 가지는 이미 연해질 대로 연해져서 세게 만지면 짖이겨지니 조심해야 한다.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새콤한 맛이 추가 되고, 매실액을 한 수저 넣으면 혀에 착 감기는 감칠맛이 추가된다. 다 무친 가지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아 입으로 넣는다. 간이 된 국간장, 마늘, 참기름 맛을 차례로 뱉어내는 가지를 입에 품고 있으면 그저 행복하다.
가지 만들 동안 반을 갈라 세토막을 낸 후 식초물에 담궈놓은 양배추를 꺼내어 물에 헹군다. 찜기에 처음부터 넣고 8분을 찌면 잎이 하늘하늘하게 익는다. 익히기 전엔 억세고 빳빳하기만 하던 양배추잎들이 뜨거운 김을 한바탕 먹고선 순하게 길들여진다. 잎의 반대쪽으로 접었다간 부러지기까지 하던 잎이 찐 후엔 내가 하잔대로 따라온다. 양배추는 익으면 순해진다.
양배추를 식히는 동안 상추를 씻는다. 상추를 담궜다 꺼내도 좋지만 왠지 으드득 입 속에서 흙이 씹힐 것만 같아 물을 약하게 틀어놓고선 한장 한장 앞 뒷면을 정성스레 씻어낸다. 씻은 상추들은 가지런히 같은 모양으로 정리한다. 쌈으로 먹는 것도 좋지만 내일 상추 몇 장 북북 찢어 국간장, 멸치액젖, 마늘, 참기름, 매실액 넣고 상추 겉절이를 해먹을 상상도 해본다.
싱크대에 방울토마토가 기다리고 있다. 토마토는 늘 꼭지부터 곰팡이가 생긴다. 물에 담근 후 꼭지를 떼어내는데 물 위에 둥둥 뜬 꼭지들이 꼭 별모양 같다. 하나하나 뽀독뽀독 씻다가 지루해져 나중엔 흔들흔들 건성건성 씻었다. 기획세트라고 두팩이나 샀더니 큰 락앤락 통에 한번에 들어가질 않는다. 남은 것들은 아이들이 하원하면 줄 생각에 채반에 받쳐 그대로 둔다.
오이는 물로 헹구고 필러로 껌질을 대충 벗긴다. 껍질 째 먹어도 좋지만 듬성 듬성 남은 오이껍질이 어쩌다 씹히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알면서 눈감아주는 시늉으로 대충 껍질을 벗기고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로 토막내어 유리그릇에 담았다. 오이 잘 먹는 둘째거다.
오이고추가 남아있다. 오이고추를 물에 씻고 보니 쌈장 생각이 간절해져 잠깐 딴 길로 샌다. 며칠 전 전통장을 샀다.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분인데 가평에서 전통장도 담그시고 때때로 마르쉐 시장에도 나오시는 것 같았다. 1kg을 배송 받아 첫 개시. 작은 그릇에 된장 4스푼, 마늘, 꿀, 매실액을 듬뿍 넣고 저어준다. 마지막은 참기름을 쪼르르 넣고 냄새를 맡으니 고소한 향이 진동한다. 오이고추 하나를 들고 수저에 묻은 쌈장을 긁어 고추에 잔뜩 묻혀 입으로 가져간다. 아쟉. 씹힌 오이고추에 쌈장 맛이 섞이니 짭짤하고 시원하다. 이맛에 여름이다.
채소들을 다듬고 찌고 만들다 보니 찰기 없는 보리밥이 그립다. 보리와 백미를 일대일로 섞어서 물에 잠시 불렸다. 백미코스로 밥을 하니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보리밥이 만들어졌다. 알곡 가운데 줄이 하나 그어있는 보리밥은 볼 때마다 귀엽다.
갓 씻어서 물방울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상추 두 잎을 겹쳐 보리밥을 한술 떠놓고 솓가락 끄트머리에 쌈장을 약간 묻혀 밥 위에 떨어뜨린다. 왼손바닥으로 상추를 받치고 누구보다 빠르고 잽싸게 오른 손가락을 모두 사용해서 상추 가장자리를 모은 후 입속에 넣고 와앙. 씹는 순간 상추쌈이 두동강 나면서 입안에 제일 먼저 참기름 냄새가 퍼진다. 그리고 쌈장의 짠맛, 그리고 갓한 보리밥의 부슬부슬한 뜨듯한 온기가 순서대로 전해져온다.
이왕 먹은 김에 차례대로 다 먹어볼 참이다. 아직 저녁밥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건만 이른 저녁을 먹게 생겼다. 양배추를 집는다. 양배추는 쪘더라도 상추처럼 잘 모아지지가 않아 밥을 올려놓고 쌈장을 묻힌채로 피자 먹듯 앙. 앙. 앙. 끝까지 올라가며 헤치운다.
아삭아삭, 써근써근, 오둑오둑, 부슬부슬, 포슬포슬. 와앙.
맛있는 여름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고 먹다보니 무친 가지는 반이나 사라졌고 오이고추, 상추도 한움큼씩 사라져있다. 여름을 먹는 소리에 입맛이 자꾸 돌고 자꾸 살아 큰일이다. 가을도 오기 전에 천고마비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