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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ug 23. 2021

엄마는 그렇게 세상과 멀어지고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들어가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 엄마의 지속된 음주와 중독, 그로 인해 엄마 본인은 물론이고 딸인 나의 삶까지 맥을 못 추고 더운 여름날 주머니 속 카라멜같이 녹아내리는 날들이 반복되던 때. 인터넷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을 검색하고 나와 비슷한 사정들을 찾아보았다. 이런 불행이 나에게만 있는 것 같다가도 비슷한 이야기가 눈에 띄면 왜인지 불행이 반감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알게 된 곳인데 카페 메인에 뜨지 않았으나 굳이 카페명을 찾아 들어가는 수고를 해서 글을 읽는다. 엄마의 죽음과 동시에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오긴 했어도 그 속에서 찐득하게 몸에 묻은 것들이 있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것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향을 주는 것들. 여전히 그것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중독자는 없어졌어도 여전히 중독자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 중독자 자녀의 마음과 시간으로. 중독 그 자체와 그것으로 인해 파생된 어떤 정서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들에 여전히 맞서면서.


고통 속에 있는 중독자 본인과 가족들의 게시글을 보니 그들과 같은 시공간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 느낌이 참으로 생생해서 읽고 있는 중독자 가족의 글이 내가 쓴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스크롤을 올려 닉네임을 확인해보기도 한다.  


내 아이디를 누르고 들어가면 4-5년 전 썼던 게시글들이 보인다. 28개의 글들. 아이들과 남편이 다 같이 있는 거실에서 그 글을 읽으니 마치 주변의 사물과 사람 모두 내 시야에서 벗어나고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다. 글을 보기 전까지는 존재했는지조차 몰랐을 그 기억이 글을 보자마자 떠오르기 시작했다.


술과 함께 할수록 엄마의 몸과 마음은 세상과 멀어져 갔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에도 마치 이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사람처럼 세상 물정에 무뎌져 갔다. 사람들을 부르는 법, 시장에서 혹은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돈을 내는 법에 서툴러졌다. 병원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에 익숙해져서인지 시장에 가도 사람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다반사였다. 곧장 엄마에게 왜 그런 호칭을 쓰냐고 교정해주었으나 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어 울고 싶었다. 완전하진 않았어도 어릴 적 나의 보호자였던 어른이 한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음주. 술을 먹으며 사귄 친구들과의 만남. 그 끝은 언제나 정신을 잃는 것이었고, 새벽에 기분 나쁜 전화벨이 울리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것도 물론 내 연락처를 알려줄 만큼 엄마가 정신이 있거나 연락처를 구했을 때 얘기고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때면 엄마에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길거리 혹은 어딘가에 취해 누운 엄마가 떠오른다. 그럴 때면 엄마가 여자인 게 원망스러웠다. 늘 험한 일을 당할까봐 무서웠다. 혹시 내가 모르는 일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느 날은 경찰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여기 모텔에 있으니 와달라는 전화였다. 카페에서 본 글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중독 증세가 심해지면 처음엔 집에서 그리고 밖을 전전하다가 결국 아무도 없는 모텔. 보는 눈도 없고 간섭할 사람도 없는 어두운 모텔에 소주 몇 병을 사들고 들어가 커튼을 치고 술을 먹는다고 했다. 말기 중독의 끝까지 갔다가 살아온 생존자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그렇게 커튼을 친 채 세상과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내가 육아휴직 중 7개월짜리 아기를 돌볼 때였을 것이다. 남편은 출근했고 아이를 집에 두고 갈 수도, 그렇다고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아기띠로 아일 안고서 내 몸집보다 큰 엄마를 어쩔 것이며, 술 취한 엄마를 집에 또 데려오면 내가 어쩔 것인가. 처음이었다. 엄마를 데리러 가지 않은 날이. 사실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일이기도 했다. 더이상 엄마의 뒤치닥꺼리를 하지 않겠다라는 다짐.


그리고 3일 뒤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다행히 주말 아침이었고 남편이 있어 아기를 맡길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엄마가 있는 지구대로 향했다. 엄마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내딛는 납작한 검은 플랫슈즈를 보며 내 팔짜야. 했던 것 같다. 경찰서에서 마주친 엄마는 짧아서 헝크러질 것도 없는 파마머리가 이리저리 뻗쳐있었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마자 목이 메었다. 곧바로 목이 뜨거워졌고 눈물이 흐르려던 걸 꾸욱 참았다. 엄마가 초라하고 안타까웠던건지 동시에 이런 모습을 하고 나타난 엄마에게 분해서였는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술에 취했어도 민망함은 있는 것인지 정신이 없는 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경찰서라 말을 더 잘 듣는 것 같기도 했고. 출발 전 미리 부른 병원차가 마침 도착했다. “엄마 이제 병원가자. 이제 정말 병원가자.” 라는 말에 퀭하게 풀린 눈으로 나를 흘겨보고 말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엄마를 부축하고 초록 불빛을 내뿜는 하얀 병원차로 향하는 발걸음 뒤 우리 모녀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뜨겁게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보이는 눈빛과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그들의 말들.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런 엄마를 두고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할까. 차라리 그들이 나를 동정이라도 해주면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런 동정이라도 필요한 날이었다.


병원에 있는 엄마는 술에서 깬 뒤 내게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할까. 몇 달 뒤 퇴원하면 또 어떻게 하나. 외출하고 싶다고 하면 어쩌지. 도대체 이 굴레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럴 때면 그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나처럼 술을 먹는 엄마와 아빠를 둔 딸과 아들들이 남긴 글들을 읽었다. 그들의 답답함과 무력함이 나의 것과 섞여 좀더 희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다 모인 곳 같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가장 내 마음이 편했던 곳도 그곳이었다. 불행이 모인 곳 속에서 평안을 찾고 위로를 얻고 있었다. 그곳에 자주 들락날락하다보니 자주 오는 회원들의 별명을 외우게 되고, 단주 100일차, 단주 50일차라는 글을 열심히 올리다가 보이지 않는 회원들이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멀어지는 순간에도 세상이 아무 문제 돌아간다는 사실이 참 야속했던 날들이다. 나말고 다른 불행들이 존재함에 안도했던 날들. 세상과 그곳에서 멀어지는 엄마의 간극을 좁히려 애썼지만 그것이 나의 영역이 아님을 알면서 어찌할 수 없던 날들.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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