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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Aug 04. 2021

하얀 우유와 시뻘건 가슴

나를 밀어내는 어떤 앎에 대해서

냉장고에서 새까만 브라우니를 꺼냈다. 한입 베어 무니 텁텁한 입안을 적셔줄 하얀 우유가 간절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새빨간 뚜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몇 번 돌렸을까. 시뻘건 젖꼭지가 떠오른다. 하루에 몇 번씩 젖을 짜내느라 착유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젖꼭지.


아이가 태어나고 모유수유를 시작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1-2시간에 한 번씩 젖을 찾았다. 그저 오물오물 대는 정도로만 목을 축이다가 2주가 지나니 썩썩 소리를 내며 젖을 빨아댔다. 아이가 빠는 힘이 좋아질수록 젖꼭지에 상처가 늘어갔다. 특히 수유를 마치고 나면 젖으로 가득 찬 유선과 함께 불어있던 젖가슴이 푹 꺼졌지만 젖꼭지만큼은 탱탱 불어있었다. 십여분 남짓 아이 입속에 침으로 인해 살이 후둘후둘해져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슴을 스치는 얕은 자극에도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 내가 아이를 먹이던 나의 젖과 내가 먹는 이 하얀젖이 달라 보이지 않았다. 며칠  읽은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란  때문인가. 홍시와 카라라는 고양이를 입양한 작가는 말했다.


 ‘내가 먹는 돼지와 내가 먹이는 고양이가 결코 다를 리 없다는 걸 머리로 연결했던 날, 나는 동물을 먹지 않고 살아보기로 다짐했다.’ (204 p.)


홍시와 카라라는 고양이와 함께 산 이후부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한 사람. 동물들을 잔혹하게 착취하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살아보기로 한 그의 이야기가 뇌리에 남았는지 우유를 먹다가 젖소를 떠올렸다. 분명 우유를 먹는 것은 나인데, 쓰라렸을 젖소의 감각이 다가온다. 어떤 앎은 주어의 자리에서 나를 내밀고 다른 존재를 들이민다. 내가 아닌, 그 사람, 혹은 그것, 그 생명체. 그것들이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해 쓰게 만든다.


착즙기의 조여 오는 압력에 쭈욱 당겨져 찌그러진 젖꼭지가 내뱉었을 젖. 우유를 한입 먹고 그 이상을 먹지 못한 채 싱크대에 쏟은 채 혼잣말을 했다. “너도 참 유난이다. “


우유를 쏟고 난 후 유튜브에서 젖소 착유, 낙농업 학대 등을 검색해서 찾아봤다. 한 의사가 말했다.


“지구 상에서 젖먹이 이후에 젖을 먹는 생물은 없어요, 인간 말고는,”


젖먹이를 한참이나 지난 나와 갓 지난 나의 아이들이 먹어야 할 음식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직도 어떤 존재의 피와 살을 먹는 내 모습으로 이 런 생각을 하는 것이 꽤나 위선적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또, 그리고 여전히 아는 것보다 사는 것보다 앞선 글을 쓰고 부끄러움을 맞이한다.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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