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밀어내는 어떤 앎에 대해서
냉장고에서 새까만 브라우니를 꺼냈다. 한입 베어 무니 텁텁한 입안을 적셔줄 하얀 우유가 간절했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새빨간 뚜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몇 번 돌렸을까. 시뻘건 젖꼭지가 떠오른다. 하루에 몇 번씩 젖을 짜내느라 착유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젖꼭지.
아이가 태어나고 모유수유를 시작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1-2시간에 한 번씩 젖을 찾았다. 그저 오물오물 대는 정도로만 목을 축이다가 2주가 지나니 썩썩 소리를 내며 젖을 빨아댔다. 아이가 빠는 힘이 좋아질수록 젖꼭지에 상처가 늘어갔다. 특히 수유를 마치고 나면 젖으로 가득 찬 유선과 함께 불어있던 젖가슴이 푹 꺼졌지만 젖꼭지만큼은 탱탱 불어있었다. 십여분 남짓 아이 입속에 침으로 인해 살이 후둘후둘해져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슴을 스치는 얕은 자극에도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때 내가 아이를 먹이던 나의 젖과 내가 먹는 이 하얀젖이 그리달라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읽은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란 책 때문인가. 홍시와 카라라는 고양이를 입양한 작가는 말했다.
‘내가 먹는 돼지와 내가 먹이는 고양이가 결코 다를 리 없다는 걸 머리로 연결했던 날, 나는 동물을 먹지 않고 살아보기로 다짐했다.’ (204 p.)
홍시와 카라라는 고양이와 함께 산 이후부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잊지 않기로 한 사람. 동물들을 잔혹하게 착취하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살아보기로 한 그의 이야기가 뇌리에 남았는지 우유를 먹다가 젖소를 떠올렸다. 분명 우유를 먹는 것은 나인데, 쓰라렸을 젖소의 감각이 다가온다. 어떤 앎은 주어의 자리에서 나를 내밀고 다른 존재를 들이민다. 내가 아닌, 그 사람, 혹은 그것, 그 생명체. 그것들이 느끼는 어떤 것에 대해 쓰게 만든다.
착즙기의 조여 오는 압력에 쭈욱 당겨져 찌그러진 젖꼭지가 내뱉었을 젖. 우유를 한입 먹고 그 이상을 먹지 못한 채 싱크대에 쏟은 채 혼잣말을 했다. “너도 참 유난이다. “
우유를 쏟고 난 후 유튜브에서 젖소 착유, 낙농업 학대 등을 검색해서 찾아봤다. 한 의사가 말했다.
“지구 상에서 젖먹이 이후에 젖을 먹는 생물은 없어요, 인간 말고는,”
젖먹이를 한참이나 지난 나와 갓 지난 나의 아이들이 먹어야 할 음식에 대해서 생각한다. 아직도 어떤 존재의 피와 살을 먹는 내 모습으로 이 런 생각을 하는 것이 꽤나 위선적이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또, 그리고 여전히 아는 것보다 사는 것보다 앞선 글을 쓰고 부끄러움을 맞이한다.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