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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Dec 09. 2021

아이의 이야기 속 나의 이야기

아이의 커가는 마음과 몸이 불러오는 생각들



6 슬그머니 존재감을 드러내던 아이의 자아가 7살이 되자 훨씬 선명해졌다. 나의 아이 나의 무엇으로 표현되던. 그렇게 표현함에 따라 나의 무엇, 엄마의 무엇으로 인식되던 아이가 이제는 온전히 그만의 존재함을 표출한다.


한 때는 전부였던 엄마와의 시간, 엄마의 사랑이 이젠 우선순위에서 밀려 친구들과의 시간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다. 아이를 4시쯤 일찍 데리러 가면 입이 삐쭉 나와 신발을 마지못해 느릿느릿 신는다. “엄마 단축근무도 끝났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와? 애들이랑 재밌는 거 하고 있었는데”


아이들 생각에 열일 제쳐두고 갔는데 돌아오는 것은 아이의 새침한 냉대. 어린이집 현관에서 환영받지 못한 채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나려던 찰나 “엄마 와떠. 우리 엄마야!” 하며 발 구르는 세살 둘째 아이 덕에 민망함이 조금은 씻겨나간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면 몇 주전까지만 하더라도 엄마와 아빠에게 부탁을 하던 아이가 이제는 물을 끝까지 내릴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손이 덜 가서 편하긴 한데 내가 차지하던 자리가 좁아지는 것 같아 아쉽다. 신문지 게임처럼 신문지 위에 올라서 있다가 신문지가 한번 접히고 두 번까지 접혀 한 발에 까치발까지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사춘기가 되면 내가 설 수 있는 아이의 신문지가 손가락 한마디 정도는 될까.


며칠 전 어린이집 친구와 갈등이 있던 첫째는 집에 오는 30분 내내 친구 이야기만 했다. 자기보다 다른 아일 더 좋아하는 그 친구의 행동이 자기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어린이집을 며칠 쉬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가 본인을 전처럼 좋아해주지 않는다면 본인도 그 친구를 삼총사에서 지우겠다고 벼르는 아이는 전투적이었고 그런 아이가 낯설었다.


우리 부부 이외에 친구라는 부분이 아이의 중요한 영역으로 들어와 영향을 주는 일. 아이가 관계의 당사자로서 상처를 입고 상처를 주고 본인이 이 상황을 견디기 위해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사용하는 모습. 갈등에 부딪혀 그 시간을 통과해내는 것을 옆에서 보니 마음이 근질근질하다. 내 아이의 뜻대로 그 친구가 움직여줬으면 하는 솔직한 마음도 든다. 무엇보다 내게도 노력과 마음대로 안 되는 것들. 재능, 욕심, 의지만으로 이루기 힘들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래서 익숙해졌던 포기의 순간들. 우선순위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상실감을 옅어지게 만들었던 일들.


아이의 마음이 자라며 홍역을 치를 때면 불현듯 곧 크게 될 아이의 몸이 자연스레 연상이 된다. 그러면서 드는 여러 가지 감정들. 당황스러움 마주하기 싫음 회피. 아이의 몸이 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덜컥 두려운 마음부터 드는 것이다. 아들을 둔 아버지들의 마음도 이럴까. 정확히는 자라는 내 몸을 내가 보며 겪은 느낌과 감정들이 좋았다거나 온전히 내 것이라는 확신이나 자신이 없었기에 그것을 나의 딸이 그대로 경험할까 두려운 것이다.


열세 살 첫 생리가 시작하고 팬티에 묻은 갈색혈에 얼굴이 달아올라 도망치고 싶던 기억. 여성의 몸이 되어가며 마주했던 불안과 당혹감들. 생리가 시작되고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들. 여자는 몸 간수 잘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사랑이 전제가 된 언어였지만 위협적인 말들. 늦은 귀가길 늘 느꼈던 강간의 위협. 통제받는 대상의 몸을 가지고서 몸을 사려야 했던 날들은 여전히 내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기가 되어서도 해결되지 못했고 여전히 내 몸에 대해, 내 몸을 바라보는 내 자신에 대해, 내 몸을 둘러싼 여러 시선에 대해 혼란스럽기만 하다.


표면적으로 자라는 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나의 이야기. 해결되지 못한 나의 몸과 마음. 성인이 되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세상과 타인과 나 자신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 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감정, 생각에 대한 이야기.


이 글을 시작하면서 점점 커가며 멀어져 가는 딸아이에 대한 서글픔과 허전함에 대한 글이 될 줄 알았다. 쓰고 쓰고 쓰다 보니 커가는 나를 둘러쌌던 압도적인 환경들. 통제되어야 하고 관리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의 몸을 가진 여성과 아이의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우리는 몸을 느끼거나 경험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자신의 강점들을 알아보고 인식하는 방법을,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담고 있던 포장을 가치 있게 여기거나 존중하거나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대신에 우리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웠고, 섹슈얼리티를 욕망의 대상이 될 능력과 결부시키도록, 우리 몸의 가치를 타인들에게서 찬탄을 이끌어내는 능력으로 측정하도록 배웠다.

- 캐럴라인 냅, 욕구들.


이 사회에서 태어나 자신이 타고난 그릇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갈 수 있을까. 그것이 체험이나 배움으로 가능한 일일까. 내 마음과 몸이 누군가의 대상이 아닌 온전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 정신과 육체의 영역에서 어쩌면 피곤한 일이(그것도 무지무지하게) 될 수도 있는 이 일들을 나는 어떻게 헤쳐나갈 것이며 아이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며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나의 과거가 아이의 마음과 몸에 고스란히 재현되지 않기 위해선 어떤 일들이 필요할까.


아이 이야기를 하다 먼 곳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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