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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Dec 25. 2021

아파도 메리 크리스마스

수술을 했다. 몸이 미웠다.



4-5일 만에 집에 오니 그새 집의 냄새가 낯설다. 수술 후 많이 걸어야 장유착 가능성도 줄이고 회복이 빠르다는데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다.


입원 기간 동안 옆에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은 70대 할머니가 계셨다. 수술 전 혈액 검사나 관장과 같은 일들로 힘들어하시고 수술 후에는 통증으로 괴로워하셨다. 수술이 끝나고 아이고 나 죽네 어째 이리 아프까, 하며 신음하는 할머니 소리가 가깝게 들려 괴로웠다. 타인의 소리가 그저 싫었다기보다 할머니의 소리는 내 안에서 나의 감각으로 변했고 나까지 아파왔다.


퇴원했던 날. 집에 와서 잘 걷지도 못하고 배가 아파 기침을 하지 못해 아직도 가래 낀 목소리의 엄마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 첫째 아이. 뭘 먹은 건지 빵빵한 배를 내밀고 나타나서는 엄마 와써? 라며 그저 행복한 둘째. 아이들을 보면 모성이 샘솟아 이겨내야지 하는 마음이 들 줄 알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혹여라도 아이들이 수술 부위를 건드릴까봐 걱정이 되었고 아이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엄마를 만지고 싶던 아이들은 내 발밑을 삥 둘러 곁으로 왔다.


아침에 남편이 아이들을 챙겨서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좀 걷는다. 그러다 아이들 방에 간다. 두 아이의 온기가 그대로다. 정리하지 않은 이불을 보니 자면서도 뒤척이며 움직였을 아이들의 오동통한 팔다리를 보는 것 같다. 침대 틈으로 빠져나온 이불에 가까이 코를 댄다. 그 냄새를 맡자마자 일이초만에 코가 막히고 눈물이 흐른다. 매 순간 빨빨대고 시끄러운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내 처지가 대조된 건지. 아이들 냄새에 그냥 무의식적으로 눈물이 난 건지. 아무런 의도 없이 몸짓과 눈빛만으로도 생의 의지를 품고 있는 아이들에게 노출이 되어서 그런 건지. 아프니까 살기 싫다는 생각을 했던 나 자신에 대한 어떠한 감정으로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난소 한쪽이 터져 피가 났고 뱃속에 피가 찼다. 맹장인 줄 알고 갔던 병원에서는 응급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 음성 결과가 나와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해서 진통제 세 팩을 맞아가며 꼬박 하루를 기다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건강하게 살기 위해 운동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자 애를 쓰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자 노력하고 열심히 책을 읽고 없는 시간을 쪼개어 글을 썼던. 모든 시간을 의욕으로 그득그득 채웠던 내가 지금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며칠 전의 나와 지금 내 상태의 간극이 아득하다. 불과 며칠 전의 내 삶이 멀게만 느껴진다.


무엇보다 내 몸을 내가 제어할 수 없다는 느낌을 견딜 수가 없다.  


수술 다음 날 낮은 빈혈 수치로 인해 온몸이 쳐지고 눈동자까지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그 상황에서 나는 속으로 내가 지금 아픈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의료진들이 정신을 차리라고 했고 대답하지 못하는 나는 그 순간에서도 내가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치만 몸은 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나를 압도하는 증상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나의 몸은 늘 나의 어떤 것이었다.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나의 정신을 사용하여 내가 원하는 대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길들임의 대상. 그리고 그런 나의 인식 속에는 이런 메시지들이 연장선 상에 존재했다.


‘노력을 안 해서 그래. 참을 수 있는데 참지 못하는 거야. 좀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데. 저 사람의 불행과 고통은 어쩌면 저 사람에게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지금 겪는 나의 아픔과 이런 일들이 내가 잘못해서 혹은 내가 나약해서 겪는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피어난다. 원인 모르는 증상 앞에서 그 누구도 아프고 싶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 아픔과 고통 앞에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몸을 통과한다. 나에 대하여 혹은 누군가를 향해 가졌던 오만함과 우월함이 부메랑이 되어 나를 덮친다.


어느 정도 나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운이 좋아서 혹은 환경이 좋아서 그간 좌절에 비해 성취를 좀 더 경험했다. 성취에 익숙해져서 좌절을 패배와 실패로 연결 짓던 나의 공식이 힘을 잃어가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들은 늘 좋은 시절이 아닌 때에 찾아온다.


느리고 불편한 나를 견뎌내는 이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어렵다. 네이버에 올라온 수술 후기를 보며 그보다 느린 내 컨디션을 원망하지 않고 내 몸의 시간에 내 마음을 맞춰야 한다. 내 몸을 대하는 너그러움은 곧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할 것이다. 내 몸을 대하는 태도는 내 삶과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로 확장될 것이고. 내 몸을 대하는 일은 작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참 바꾸기 힘든 것들. 머리로 알고 있으며 나의 지향점이 그곳이라 믿는 것들. 하지만 직접 겪지 못해 생각으로만 멈추는 것들. 그러다 불쑥 깊은 곳 감추어진 진짜 메시지들이 튀어나와 진짜 나를 만나는 일. 인지적 앎이나 지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들. 실제로 몸을 통과해야 배우는 시간들.


여기서 갑자기 마음이 철렁해지는 것은 혹시라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고통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지점이다. 실은 잘하고 싶었는데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은 마음과 몸을 지녔던 것은 아닐까. 그녀를 지나치게 미워했던 마음과 그녀를 탓하며 썼던 글들이 떠오른다.


인생에서는 나의 힘으로만은 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늦게 안 것인지 빨리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아직 머리로만 스치는 생각을 기어코 잡아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설레발을 치는 것인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오늘부터 샤워가 가능하다고 했다. 조심조심 뜨듯한 물로 머리를 감고 주사 바늘을 고정시켰던 반창고의 끈적끈적한 흔적을 몸에서 닦아내고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면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


눈 오던 날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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