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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Feb 01. 2022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나를 읽는 일이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더 지겨운 건 육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 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
-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도저히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팔 날뛰는 상처. 멀어지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조여와 올가미처럼 가죽과 속살까지 마침내 파고드는 상처를 품고 산 그의 생. 마흔이 넘어 등단한 이후 1년에 한 편 이상의 작품을 펴낼 만큼의 다작의 힘은 다름 아닌 그의 상처 아니었을까.


박완서 선생님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라는 소설을 읽었다. 선생님의 작품은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접했는데 전쟁, 오빠의 죽음, 피난길, 결혼 등 소설의 내용이 에세이와 거의 닮아있었다. 금번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었다.


“충충한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나는 번번이 깜짝 놀라곤 했다. (중략) 나 역시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우물 속의 내 모습은 부정할 도리 없이 빤히 비춰주고 있었다.”


끊임없는 자기 응시. 우물 속 선명하게 비친 얼굴에 들러붙은 두려움을 보던 사람. 그의 얼굴을 비치던 수면에 불현듯 나의 얼굴이 비친다. 가만히 들여다보자 나의 얼굴 말고도 나의 두려움이 보인다. 거절 당했던 어린 시절의 욕구, 상처 같은 것들. 그가 자신을 비추이던 우물이 이제 나를 비추이고 내 안에 명명되지 못한 채 떠돌던 감정들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한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곧 나를 읽는 일이었으며 내 안에 있던 숱한 나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올케의 옷장사와 본인의 직업으로 얻게 된 경제적 안정. 그 속에서 별 탈 없이 자라는 조카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지섭과 연애를 하며 마음을 나누는 와중에도 추위와 굶주림, 피붙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전쟁은 그의 일상 곳곳에서 얼굴을 들이민다. 만개한 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마저 감탄보다는 비탄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나도 석간신문을 보다 말고 앉은자리에서 고개를 비틀어 미친 듯이 만개한 벚꽃을 내다보았다. 왜 만개한 꽃만 보면 미쳤단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밤도 아닌, 낮도 아닌 시간의 벚꽃이 풍기는 밝음은 화사하다기보다는 숨을 틀어막을 듯이 요기로워서 그런지도 몰랐다.”


무결한 순백색 바탕에 붉은 수줍음만을 곳곳에 띈 벚꽃과는 다르게 군데군데 수치심을 묻힌 채 피붙이를 잃고 맘껏 슬퍼하지도 못하였던 지난날의 추위가 찾아온 것인지. 꽃의 꽃다움을 자유롭게 느끼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이 시절의 비극일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 나가던 극한의 상황. 그가 겪어낸 참혹한 시간과는 상관없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피는 꽃을 보고서 ‘미쳤다’고 느끼는 마음.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상관없다는 듯 무결하게 만개하는 꽃이 미웠으리라. 그러한 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는 본인의 청춘, 그리 만든 시대와 사람 그 모든 것이 미웠으리라.


전쟁이 휩쓸고 간 난리통 속 PX에 입사한 그는 미군들이 의뢰한 초상화를 그려주던 초상화 부로 입사한다. 거기서 박수근 화백을 만난다. 그저 그림쟁이 중 하나라고 알고 있던 사람이 그에게 자신의 화첩을 들이민다. 둘은 동무가 된다.


“아무튼 그는 여태껏 익명성으로부터 돌출되어 자기를 박수근으로 봐주길 요구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을 개별적으로 보는 것도 훈련을 요하는 일인지,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신경만 써지고 잘 안 됐다. 그러나 사람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순하고 덤덤한 데 있었고, 그런 것은 나타나기보다는 숨어 있는 특색이었다.”


그저 그들  하나로 인식했으면 편했을 누군가의 관계에서 맞은 전환점. 그러자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의 특색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손짓 하나 목소리 높낮이, 했던 말의 전후를 파악하고 상상하며 퍼즐을 맞추어간다. 상상하려면 관찰해야 하고 관찰하려면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 누군가의 삶을 들추어보는 노력. 누군가를 눈에 담는 일은 사람을 사랑해야   있다. 그런 사랑으로 그는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에 대해 쓰며 소설을 완성시켰을 것이다.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운이 길어 며칠을 이 소설을 떠올렸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가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문득. 소설 속 주인공에 이입을 하다 못해 동일시가 된 것인지 유별나게 추웠던 요 며칠의 날씨가 혹독하게 느껴졌고 전쟁 중 추위 속에서 세상을 등진 소설 속 주인공의 오라비가 나의 오라비인 듯 서러웠다.


소설을 쓰며 자기 치유와 해방을 느꼈다던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나 역시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상처를 마주한다. 고통을 꺼내어 직면하는 것이 주는 자기 해방을 나 역시 느낀다. 그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겸, 개발도 할 겸, 하나 둘 습작을 시작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놓치고, 남의 좋은 글을 읽고 샘을 내고 발표의 가망도 없는 글을 썼다. 차차 글 쓰는 어려움이 눈 떴다. 자연히 쉽게 쓴 글이 쉽게 당선된 데서 비롯된 내심의 은밀한 오만도 숨이 죽었다.
 (중략)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 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4년 전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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