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소설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요양원 원장님은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자주 자리를 비웠던 엄마의 부재를 대신 채워준 이가 할머니다. 원래 그 자리가 할머니의 몫인 것처럼 딸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대신 짊어지고 손녀인 나를 재우고 입혔다. 겨울밤 한기를 막아줄 솜으로 만든 둔탁하고 무거운 이불을 가슴팍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가도 자꾸만 움직이고 싶어 이불을 발로 뻥 차서 걷어냈다. 그 길로 할머니에게 가서 전날 밤에 해주던 전쟁 이야기를 해달라 졸랐었다.
할머니가 결혼하고 둘째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어린 나이에 들었기에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으나 남편인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할머니는 그나마 먹을 것이 남아있을 거라 여겨진 친정이 있는 북한으로 갔다. 지금의 외삼촌인 첫째 아들을 오른손에 꼭 붙들고 갓 태어난 젖먹이인 둘째 아들을 업고서 눈길을 헤쳐 가다 마주친 국군 이야기. 도착한 친정에서 젖먹이인 둘째를 홍역으로 잃은 것. 전쟁이 끝난 후 친정집의 모든 재산이 공산당에 의해 몰수되었다는 소식.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그런 감정에 대한 깊이도 넓이도 아직은 팽창되기 전의 시절이라 잠 안 오는 밤을 달랠 요량으로 듣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지닌 할머니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삶에 문이 닫히고 할머니가 닫힌 문 너머로 가면 그가 가진 이 이야기들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지금이라도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왜 혼자 피난을 간 것인지 할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던 북행길은 어떠했는지 묻고 싶다. 어릴 적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을 티브이에서 볼 때마다 우리 집도 그긴데 우리 집이 바로 그기 코앞인데 저 사람이 우리 가족을 알려나 했던 할머니.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읽었다. 책 표지 뒤편 작가 소개에 나온 작가의 출생연도를 보니 할머니와 두 살 차이가 난다. 박완서 선생님이 그려낸 유년시절의 무해한 찬란함과 전쟁으로 인한 혈육의 죽음과 굶주림. 이것들이 각자에게 지닌 결은 다르나 나의 할머니도 동일하게 이 시대를 통과해냈을 것이다. 말이나 글로 자세히 표현하지 못했어도 가슴속에 눌러 담은 채로 살았던 기억들. 아들의 죽음. 가족과의 이별. 언어화되지 못하였어도 할머니 마음속 깊게 새겨져 있는 일들.
이번에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기 전에 이 소설의 후속 편이었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먼저 읽었다. 거기엔 지금 주인공들이 겪는 이야기의 결말이 나와있었고 따라서 결말을 알고 보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지금 읽는 이야기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짐승의 시간을 아무런 방어나 저항 없이 그저 순한 양처럼 기다리는 작가의 유년시절이 한없이 슬프다가도 아름다웠다. 결말을 알고 보는 이야기가 더 아련하고 아름답게 느껴진 까닭은 작가의 재주일 것이다. 끝을 알지만 그래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결말에 의지하지 않고 작가가 써 내려가는 지금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능력.
전쟁으로 인해 엎치락뒤치락 인민군과 국군이 서울을 번갈아 점령하면서 민간인들이 죽어나갔다. 네 편 내 편을 가르고서 이긴 자의 편이 되지 않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의 무고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작가의 작은 숙부 역시 이념에 발도 담그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던 때에 소유하던 창고를 내어준 일로 처형까지 당한다.
자꾸만 생각이 드는 것은 작가의 작은 숙부가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작가의 오빠가 총상을 입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버지처럼 여긴 숙부 숙모와 한집에 살며 수완 좋은 숙부의 장사로 집안 살림을 늘려가며 좀 더 안정된 시기를 보낼 것이란 상상. 작가의 오빠가 총상으로 죽지 않고 올케와 조카들과 함께 누렸을 일상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졌다. 이 책 속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불행이 내가 혹은 내 가족들이 겪은 일인 듯 속이 상하고 보상이라도 받고 싶어 자꾸만 해피 엔딩을 상상한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큰 축 안에서 타의로 고향을 벗어나 이방인처럼 현저동이라는 동네에 정착한 이야기. 엄마 몰래 한 혼자만의 기행. 굿놀이를 구경하고 형무소 옆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엄마 주머니 속 쌈짓돈을 훔쳐다가 사탕을 사 먹던 이야기. 서울 토박이 아이들 틈에 끼지 못하며 느꼈던 소외감. 동시에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아 느낀 해방감. 성욕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이 오염된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 자식을 향한 엄마의 이기심. 시대를 고발하는 이 책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던 까닭은 작가가 그의 내면을 섬세히 풀어헤쳐 묘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배경과 지금의 내가 70년의 시간 차를 지니고도 마치 내가 그 당시에 서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만큼 그 내면 묘사는 놀랍게도 생생하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 싶게 비현실적인 향기에 이끌려서였다. 그늘진 평평한 골짜기에 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려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191)
그의 이야기가 그렇다.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이다. 그의 소설을 한번 읽고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려면 책을 덮고서도 사나흘이 걸린다.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은 그가 묘사한 은방울 꽃처럼 비현실적으로 서늘하고 달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