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날

현실은 그대로여도 살기 위해 쓴다.

by 한시영

써내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죽겠는, 뭐라도 써내야 살아갈 수 있는 날들이 있다. 그 날이 내겐 오늘이다.

태어난 지 3주 된 둘째와 동거 중이다. 수면과 식사 등 나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도 벅찬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거기다 2호와는 다르게 정서적 보살핌이 필요한 다섯 살 첫째를 물리적, 정신적으로 돌보자니 하루가 그냥 간다. 정말 ‘그냥’ 가버린다. 그러다 보니 찰나로 내게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을 글로 풀어내지 못한 채 흘려보낸다. 글로 쓰기 전까지 모호한 감정들이 활자로 나열되고, 어지러운 생각들이 정리되는 시간이 없으니 가슴이 꽈악 막힌다. 마치 혈관에 찌꺼기가 쌓여 온몸이 단단해져 버린 기분이다.

그렇다고 쓰자니 다음 날 살아내야 할 내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가져온 키보드를 보기만 한다. 식탁 위에 올려놓고 보기만 하느라 닳기 직전이다. 오늘은 새벽에 아이 수유 후 단단해진 가슴이 아파 유축을 하려던 찰나, 아픈 가슴은 그대로 두고 키보드 전원을 켜고 급한 대로 아이폰 메모장에 뭐라도 적는다.

글로 쓰기 전에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실체도, 존재도 없던 것들이 글자로 표현돼서 조금이라도 명확해지면 나도 내 삶도 명확해지는 착각에 빠진다. 지금도 쓰고 나니 나와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좀 더 나아진 기분이 든다. 현실은 그대로지만. 새벽 끄적임 끄/읕.


(서울로 7017, FUJI Natura B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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