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못하는 사람들
엄마가 죽었는데 엄마의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아마 올 수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그들은 장례식에 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경조사를 챙길 수 없는 처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경조사도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을 챙기고 나 역시 언젠가는 그들의 위로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토대로 한 사회적 활동. 그러나 신뢰를 저버린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것.
병원에서 이틀 밤 외박을 허가받았다. 9개월짜리 딸을 아기띠로 안고 병원에 가서 엄마를 모셔왔다. 병원이 아닌 집. 그 공간이 주는 아늑함에 취해 늦은 낮잠을 잤던 엄마다. 저녁에는 함께 ‘중독’ 세미나를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시간 삶이 정말로 변화되길 원하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라는 세미나 마지막 부분에서 벌떡 일어났던 엄마.
다음날, 지난 이십 년 간 봐오던, 본인도 본인을 어찌하지 못하는 불안함과 술을 향한 갈망이 섞인 흔들리는 눈빛으로 엄마는 나갔다. 막을 수 없었다. 병원이 아닌 이상 성인을 가둘 수 있는 곳은 없다. 보내야 한다. 늦은 밤 술에 취해 다치기라도 할까 봐 온 몸으로 엄말 밀치던 고등학생의 내가 아니다. 숱한 몸싸움의 결과는 나의 패배였다. 술을 향한 갈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게 엄마를 보냈다. 그리고 정말 엄마를 보냈다.
그렇게 흐른 일주일. 엄마의 부재. 내게 이만큼 익숙한 것이 또 있을까. 엄마의 부재는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이토록 외로운 일도 없었다. 엄마가 있지만 엄마가 없는 거. 내게 있어 엄마의 부재는 그랬다. 한번 나가면 일주일씩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곤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나 그 어떤 사과도 없이 본인의 일상을 찾아갔다. 나 역시 그저 엄마에 굶주려, 잠시라도 그 사랑을 받기 위해 일상을 되찾는 엄마의 속도에 맞춰 재빨리 걷던 나였다. 결국 그 빠른 걷기는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킨 체기로 남아있다.
이번만큼은 달랐다. 일주일이 지났고 연락도 되질 않았다. 핸드폰도 먹통이었다. 실종신고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장례를 치르는데 죽은 이를 보러 온 사람이 없다. 그저 모두 나를 보러 왔다. 엄마를 잃은 나를. 슬픔에 빠진 딸을 보러 나의 친구들이 왔고, 동료들이 왔고, 친척들이 왔다. 그곳에 망자를 그리워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 잃은 나를 가여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만이 있었다. 죽은 뒤 애도를 받고 기억되는 것 역시 그 삶이 어느 정도 평균의 범주에 들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혈육이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은 내가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